배려의 한자는 ‘配’(짝 배), ‘慮’(생각할 려)로서 사전적인 직역은 ‘짝처럼 생각하는 마음’이다. 영어의 배려를 의미하는 단어 중 명사나 형용사 등에도 앞에 ‘함께’란 의미의 접두어가 붙는다.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배려이다.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교사를 대하는 게 배려인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되살아날 것이다. 교사는 그들의 소명을 되찾을 것이다.

올해 4월 기준 통계에 의하면 강남, 서초 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경력 10년 미만 초등교사 비율이 서울 25개 자치구 평균인 35%보다 높은 41.7%라고 한다. 반면 이들 지역의 20년 이상 30년 미만 중견 교사 비율은 서울 평균인 18%보다 낮은 13.5%다. 유난히 학부모 민원이 많은 지역의 초등학교 근무를 기피하는 중견 교사가 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초임 교사가 메우는 형편이다.

에버레트 라이머(Everett Reimer)가 1971년에 펴낸 <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는 고전이 되었다. 50년 전 뛰어난 통찰력으로 공교육을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교실은 라이머 교수의 지적에 더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부분까지 죽어 버린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그러니 교육의 현장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문제를 파헤치고 반성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사명감만 강조할 일이 아니다. 교육의 객체로서의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노력하지 않는 한 학교에서 공교육 붕괴라는 이 슬픈 현실은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이것이 어디 학교만의 일이겠는가? 점차 교회에서도 배려가 사라지는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자에게 ‘톡’으로 이런저런 지적이나 주문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설교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일지라도 진심을 조금이라고 읽어낸다면 충분한 배려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기다리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만 해도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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