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난 키가 크지 않다. 그런 나는 키 큰 사람 앞에 서면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러나 결혼하면서부터 달라졌다. 나보다 8cm나 큰 아내와 결혼하고 나니 큰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당해진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물려준 유전자에 대한 감사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키 크지 않은 인물도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모습 자체로 당당하게 살고 있지만 종종 나를 주눅들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 나보다 더 열심히 살고 또 어디로 보나 존경스러운 모습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다. 큰 키가 아니더라도 존경스러운 분들은 많다.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 장기려 장로님이 그렇다. 작은 키는 그의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아들인 장가용 박사나 손자 장여구 박사 역시 크지 않다. 그러나 대를 이어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 키는 작지만 큰 인물로 보인다.

반면 크기는 한데 존경스럽지도 부럽지 않은 사람도 종종 만난다. 크기와 그가 보여주는 ‘오만’함이 비례하는 사람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꽤 많다. 자신의 힘이나 규모 등을 내세워 오만함을 보일 때 그런 사람이 안쓰럽고 불쌍하기까지 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알 만하다.

내가 너보다 크다, 많다, 또는 잘 났다 등의 비교우위! 참 저렴한 당당함이고 이런 모습이 바로 오만함이 아닐 수 없다. 키나 지식 또는 소유 등 온갖 비교할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리고 그 크기에 의해 오만함 속에 사는 이들 역시 많다. 심지어 교회 사이즈가 크다는 것으로 인해 누구에게나 당당함을 넘어선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유명한 교회를 다니는 한 교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담임목사님 손 한 번 만져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크고도 위대한데도 낮은 이 세상에 오셔서 결코 오만하지 않으셨던 주님이 떠오르면서 헛웃음이 난다.

크지만 겸손한 사람 앞에서 솟아나는 한없는 피어나는 존경심. 그러나 별것도 아닌데 끝 모르고 오만한 자에 대한 측은지심. 작아도 당당하고, 크지만 오만하지 않은 태도는 내게도 늘 큰 숙제다. 나 역시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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