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초창기 극심한 집안 반대 속에도
신앙 지키던 성도 목숨 잃는 아픔 겪어
6·25 전쟁 중에는 교회 강단 지키던
김병구 김병엽 목사 잇따라 순교하기도

수난과 핍박 속에서도 생명공동체로 훌륭히 자라왔다

정읍 신태인제일교회의 역사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아니 그 이전의 세월 속에도 심지어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에도 가슴 아픈 시련이 슬그머니 찾아오곤 했다.

정식으로 교회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20년 4월 10일의 일이다. 김제 구봉교회에 다니던 조봉구 씨가 정읍시 용북면(지금의 신태인) 표천동 언덕에서 김성순 신달화 조춘금 유기신 씨와 함께 예배하며 기도처로 출발한 것이다.

오랜 세월 수난과 핍박을 견뎌내며 신태인제일교회는 생명공동체로 자라왔다. 사진은 신태인제일교회 예배당.
오랜 세월 수난과 핍박을 견뎌내며 신태인제일교회는 생명공동체로 자라왔다. 사진은 신태인제일교회 예배당.

설립과 함께 신태인제일교회는 가슴 아픈 사건을 겪었다. 마을에 유교 전통이 엄격한 양반가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 며느리가 교회를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집안에서 그 며느리를 마루 밑 닭장 속에 가두었다. 밥도 주지 않고 모진 핍박을 가한 결과, 며느리는 결국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실상 신태인제일교회 첫 번째 순교자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사건이 첫 번째 시련은 아니었다. 표천동에 교회가 설립되기 10년 전쯤, 이웃 연정리에서 먼저 교회가 세워진 일이 있었다. 한정국 씨가 예배를 인도하며, 그를 도운 문시술 씨의 협력으로 이 교회는 예배당도 건축하며 번창해나갔다.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교회당 앞마당에 조성한 은혜의 벽.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교회당 앞마당에 조성한 은혜의 벽.

하지만 마을에 호열자(장티푸스)가 번지면서, 교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섬기던 ‘맨발’이라는 별명의 성도 가족이 한꺼번에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예배가 중단되고, 복음사역이 위축되었다.

이토록 출발이 어려웠지만 신태인제일교회는 헌신된 이들의 활약 속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1923년 4월 22일에 열린 전북노회 제12회 정기회 보고에는 김수영 조사가 신태인을 비롯한 4개 교회를 순방하며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순교자 김병구 김병엽 목사(맨 위 왼쪽부터) 최초 설립자 조춘금 유기신 권사(가운데 왼쪽부터)와 김성순 신달화 전도사(맨 아래 왼쪽부터)의 사진들.
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순교자 김병구 김병엽 목사(맨 위 왼쪽부터) 최초 설립자 조춘금 유기신 권사(가운데 왼쪽부터)와 김성순 신달화 전도사(맨 아래 왼쪽부터)의 사진들.

3년 후에는 최치국 씨가 열심히 전도하여 전북노회에 장로 1인을 청원할 정도로 교회가 번창한다. 1932년에는 무려 교인수가 314명, 교회가 운영하는 야학에 50명이 재학하는 공동체로 교세가 확장된다. 해방 후 김석진 목사가 담임하던 1946년 경에는 장년 성도가 400여 명,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은 200여 명에 이르렀다. 전북노회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큰 규모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성기 뒤에는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신태인제일교회 강단을 지키던 김병구 목사와 김병엽 목사 등 두 명의 목회자가 잇달아 순교한 것이다.

김병구 목사는 1949년 10월 신태인제일교회에 부임했다. 당시까지는 신태인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그 무렵 신태인제이교회(현 신태인중앙교회)가 분립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쓰게 됐다. 김병구 목사는 신태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뿐 아니라 전북노회장으로도 섬기면서 많은 교회들을 돌보다 전쟁을 맞았다.

1933년 12월 25일 표천동교회 시절의 성경학교 졸업식 사진.
1933년 12월 25일 표천동교회 시절의 성경학교 졸업식 사진.

많은 사람들이 권유로 잠시 피난을 갔던 김병구 목사는 결국 교회를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가 1950년 9월 10일 경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총살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김병구 목사를 한 주일학교 학생이 철길에서 마주쳤다. 그 학생에게 “나는 마지막 길을 간다고 우리 집에 말해다오”라고 당부한 말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한 이의 증언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 김병구 목사는 십자가의 주님처럼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라고 외쳤다 한다. 담임목사를 잃은 신태인제일교회에는 강단을 대신 맡아줄 목회자가 필요했다. 마침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퇴각도 시작됐다.

부안과 고창 등지에서 사역하던 김병엽 목사가 찾아와 닫혀있던 교회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종을 울렸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10월 첫 주에는 감격의 예배가 다시 열렸다.

1960년 당시 구 예배당 앞에서 촬영한 신태인제일교회 성도들의 단체사진.
1960년 당시 구 예배당 앞에서 촬영한 신태인제일교회 성도들의 단체사진.

안타깝게도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장산 일대로 숨어들었던 빨치산들이 10월 10일 기습적으로 마을에 들이닥친 것이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던 김병엽 목사는 창문을 깨며 교회당으로 침입한 이들의 총격 앞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날의 새벽예배를 함께했던 고 이윤복 장로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소서”가 김병엽 목사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참혹했던 아픔을 뒤로 하고 남은 이들은 복음의 여정을 꿋꿋이 전개해나갔다. 그렇게 또 세월은 흘러, 2010년에 신태인제일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 사이 가물가물해졌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은 교회 100년사를 편찬하고, 역사실을 설치하며 되살아났다. 교회당 안에는 두 순교자의 사진이 걸렸고, 머지않아 순교기념비도 세워질 예정이다.

현재 교회를 담임하는 김만곤 목사는 “목숨 바쳐 교회를 지킨 분들의 희생을 마음에 간직하며, 새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 속에 고인 눈물은 앞으로도 신태인제일교회의 생명사역에 지치지 않는 힘을 불어넣을 것이다.

“순교신앙 본받아 공동체 이뤄갈 것”

신태인제일교회 김만곤 목사

“담임목사가 새벽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순교한 우리 교회의 사적은 성도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교훈으로 삼고, 그 후예인 우리도 충실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신태인제일교회 김만곤 목사는 3년 전 맞이한 설립 100주년을 계기로 교회의 역사 찾기 작업이 본격화됐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두 목회자의 순교사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고, 교우들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던 초창기의 이야기들도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게 됐다.

이렇게 모은 몇몇 사진들과 옛 성도들의 유품들은 교회당 1층 ‘나눔의 방’이라 명명한 친교실 내 작은 전시공간에 놓여있다. 교회 최초 설립자 조춘금 유기신 권사와 김성순 신달화 전도사, 그리고 순교자 김병구 김병엽 목사 등의 실제 모습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고 오문정 장로와 최종섭 집사 등의 기증물품, 이영자 권사의 필사성경 등도 나란히 전시돼 있다.

100년 역사와 순교사적을 저력으로 삼아 더욱 역동적인 공동체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신태인제일교회 김만곤 목사.
100년 역사와 순교사적을 저력으로 삼아 더욱 역동적인 공동체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신태인제일교회 김만곤 목사.

“역사를 기념하는 또 다른 공간은 우리 교회에서 ‘은혜의 벽’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교회 경내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100년의 은혜를 새로운 100년으로’라는 글귀를 새겨놓고, 성도들이 출입할 때마다 신앙의 분발을 다짐하도록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신태인제일교회의 비전을 김만곤 목사는 SBS라는 세 글자로 설명한다. 첫 글자 S는 ‘살리다’(saving)는 뜻으로 온 성도들이 태신자 한 사람씩을 품고 기도한다는 사명과 예배공동체의 꿈을 담았고, B는 ‘세운다’(building)는 뜻으로 훈련과 헌신으로 나아가는 양육공동체의 소망을 담았다. 마지막 S는 ‘보내다’(sending)라는 뜻으로 선교공동체로의 다짐을 담았다.

이 비전들은 김 목사가 부임한 이후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구체화되어왔다. 전통적 신앙색채가 강한 교회였던 데다, 인구감소와 역외유출을 피할 수 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신태인제일교회가 오늘날 꾸준히 성장하며 예배 양육 사역 등 전반적인 면에서 역동성 강한 공동체로 좋은 소문이 날 수 있었던 것은 온 교회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성공한 덕분이다.

김 목사는 “얼마 전 온 교회가 신안군 증도의 문준경순교기념관으로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순교신앙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저력과 성취들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며,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더욱 단단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부연한다.

전서노회를 통해 제108회 총회에 헌의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지정 신청이 이루어진다면, 신태인제일교회의 향후 행보에 커다란 응원이 될 것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조만간 교회당 입구를 ‘제일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하고, 그 자리에 순교기념비 등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는 상징물들도 설치할 예정이다. 신태인제일교회의 더욱 찬란한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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