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하며 다시 복음 여정 시작한다

1900년 설립돼 전북 서남부 복음화 기원
순교자 박봉래 장로와 박동춘 집사 기념

전북 서남부의 교회사는 매계교회의 설립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진은 매계교회당 전경.
전북 서남부의 교회사는 매계교회의 설립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진은 매계교회당 전경.

매계교회(박종남 목사)가 위치한 정읍시 태인면 매계리는 현재 조그만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정읍 보림면의 소재지로서, 전주 정읍 장성 광주 목포를 잇는 길목 역할을 했다. 자연히 선교사들이 즐겨 이용하는 복음의 통로로서도 활용되었다.

미국남장로교 7인 선발대 중 한 사람인 루이스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전주서문교회와 김제 금산교회를 거쳐 정읍까지 내려와 사역하는 데에도 매계교회는 중요 거점이 됐다.

매계교회 설립자 최중진 목사(앞줄 왼쪽)와 그 형제들.
매계교회 설립자 최중진 목사(앞줄 왼쪽)와 그 형제들.

하지만 매계교회가 세워진 배경에는 한국인 스스로의 역할이 더 크게 작용했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가 큰 좌절을 맛본 정읍 사람 최중진이 우연히 만난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감화를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최중진은 선교사를 돕는 조사로서 헌신하고, 정읍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나서게 된다.

그러던 중 매계리에 들러 동네 갑부인 황운섭을 만나 전도했고, 이를 통해 그 집안의 모든 식솔들까지 예수를 믿는 일이 생겼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황운섭이 후원하고, 최중진의 동생 최광진이 목수 역할로 섬기며 ‘ㄱ’자 모양의 예배당도 건립된다.

이를 통해 1900년 매계교회가 정읍을 비롯한 전북 서남부지역 최초의 교회로 설립됐다. 이후 매계교회 초대 장로를 맡은 최중진은 계속해서 정읍 부안 고창 등 인근 지역을 누비며 천원교회 화해교회 구중교회 화호교회 정읍제일교회 흥덕교회 동호교회 관동교회 진성동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을 세운다.

매계교회의 두 순교자 박봉래 장로와 박동춘 집사의 기념비.
매계교회의 두 순교자 박봉래 장로와 박동춘 집사의 기념비.

복음전도 뿐 아니라 매계리에 학당을 세우고 젊은이들을 민족지도자로 양성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황운섭을 비롯한 매계교회의 성도들 또한 조력자로서 최중진의 사역들을 열심히 도왔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본 선교사들은 최중진이 신학수업을 받도록 추천했고,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1909년 3월 학업을 마치고 정읍으로 돌아온 최중진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목사의 신분으로 돌보게 된다.

하지만 그 감격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중진과 선교사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이 이른바 ‘자주교회 사건’으로 불거지면서, 최중진은 1910년 전라대리회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다. 한국장로교회사에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함께 분란에 휩쓸리게 된 매계교회 또한 1914년에 폐쇄되는 비운을 맛본다.

매계교회 성도들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신앙을 물려받은 후예들이다.
매계교회 성도들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신앙을 물려받은 후예들이다.

그렇게 멈춰버리나 싶었던 교회의 명맥은 1923년 전주에서 매계리로 이사온 박봉래를 통하여 다시 뛰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후 사정을 자세히 전해들은 박봉래는 손수 나무를 베어다 교회 종각을 다시 세우고, 닫혀있던 예배당 문을 열어 깨끗이 청소하며 매계교회의 재건에 나섰다. 그리하여 폐쇄된 지 10년만인 1924년 부활주일에 낭랑한 종소리와 함께 다시 감격적인 예배가 열렸다.

이후 이웃한 천원교회 출신의 박창욱 목사가 부임하며 매계교회는 본격적으로 전도에 열을 올리며 큰 부흥을 경험한다. 재건의 공로자인 박봉래 또한 제3대 장로로 임직하며 교회 지도자이자 민족 지도자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큰 시련이 매계교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난 기쁨도 잠시, 6·25전쟁의 발발로 성도들은 엄청난 위협에 처한다. 정읍에 진주한 인민군과 이에 협력한 좌익세력이 교회당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접수한데 이어, 박봉래 장로를 우익인사로 분류해 체포한 것이다.

결국 박봉래 장로는 1950년 8월 5일 인근 태창리의 돌미산 언덕에서 공산세력에 의해 처형되며 순교의 길을 걷는다. 희생은 박 장로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교사들을 돕는 매서인이자 전도인으로 활약했던 박동춘 집사 또한 다른 우익인사들과 함께 정읍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유치장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절명했고, 박봉래 장로의 큰아들로 김제 낭산교회를 섬기던 박종현 장로 또한 인민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자주교회 파동 속에서 문을 닫았던 매계교회는 폐쇄된 지 10년 만인 1924년 부활절 예배의 종소리와 함께 재건됐다. 사진은 현재 종탑의 풍경.
자주교회 파동 속에서 문을 닫았던 매계교회는 폐쇄된 지 10년 만인 1924년 부활절 예배의 종소리와 함께 재건됐다. 사진은 현재 종탑의 풍경.

교회의 주축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종문 집사를 비롯한 남은 성도들은 일대에 잔존하는 빨치산의 위협 속에서도 또다시 예배를 시작했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눈물 위에서 더욱 강한 공동체를 기어이 이루어냈다.

이후에도 교역자의 잦은 이동, 급격한 이농현상, 신광교회로 교회명칭 변경 등 크고 작은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1992년에 김옥경 목사가 제16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27년 동안 장기목회를 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김옥경 목사는 매계교회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환원하는 것을 비롯해, 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들을 복원하는 일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2000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며 <매계교회 100년사>를 편찬하는가 하면, 박봉래 박동춘 등 두 순교자의 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2019년에 부임한 박종남 목사 또한 따뜻한 돌봄과 섬김으로 교회와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는 데 앞장서는 중이다. 권순만 원로장로와 김상영 이선종 시무장로 등 여러 교우들도 이에 열심히 협력하며, 매계교회는 마을교회로서 위상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굳센 결속 덕분에 코로나19라는 세 번째 큰 위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복음의 행진을 펼치고 있다.

매계교회 100주년 기념예배 당시의 모습.
매계교회 100주년 기념예배 당시의 모습.

올해 매계교회는 전서노회를 통해 두 순교자의 총회순교자 명부 등재와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및 순교기념교회 지정을 총회에 청원했다. 청원이 이루어지면 2년 앞으로 다가온 매계교회 설립 125주년에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박종남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성도들과 뜻을 나누며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빛나는 역사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도록 모두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앙 중심 된 마을문화 계속 꽃피워 갈 것”

정읍 매계교회 박종남 목사 

“최초라든가 시발점과 같은 우리 교회에 대한 수식어들을 접할 때마다 자부심과 동시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나온 시간들 그 이상의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는 각오를 온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정읍 매계교회 박종남 목사는 전북 서남부지역 최초의 교회라는 타이틀이 지나온 과거의 자랑만이 아니라,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되도록 애쓰고 있다고 밝힌다. 2년 후 맞이할 설립 125주년을 앞두고, 전서노회를 통해 총회에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과 순교자 등재 등을 청원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전남북을 잇는 요충지이자 면 소재지로 왕성하던 시절은 지나갔고,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이 모여 집회를 열던 이야기도 이제는 마치 전설처럼 여겨지지만 매계교회는 여전히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고 돌보는 사명 위에 서있다.

박종남 목사에게는 매계교회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들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도약을 향해 가야 할 과제가 있다.
박종남 목사에게는 매계교회의 소중한 역사적 자산들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도약을 향해 가야 할 과제가 있다.

“2019년에 매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1년 사이에 갑자기 교인 수가 100명 이상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그 직후에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기는 했지만, 지금도 상산 중산 하산 등 3개 마을 총 110가구에서 80명 넘는 성도들이 출석하며 신앙이 중심이 된 생활문화를 꽃피우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새에덴교회와 정읍성광교회 등 주로 대형교회에서 부교역자 사역을 해 온 박종남 목사에게 첫 담임목회지에서 겪는 시골생활은 사실 낯설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이든 성도들이 겪는 외로움과 고달픔에 깊이 공감하며, 이를 품어주는 목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따뜻한 공동체 분위기와 새로운 저력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최근에는 예배당 리모델링을 통해 어르신들이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계단 높이를 낮추고, 미니 카페를 설치하는 등 내부 환경도 바꾸었다. 앞으로 새롭게 교회 역사자료들을 발굴하고 이를 소개하는 공간을 확충해 성도들의 자긍심을 더욱 높일 방침이다.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는 교회’를 표어로 삼고 있습니다. 매계교회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수많은 분들을 기억하며, 이들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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