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황=보편화의 길에 들어서
(2) 좌담=문제는 고치고 넘어가야

*좌담 참석자
김동문 목사 (36·살렘교회 담임)
김동욱 목사 (35·대길교회 대학부)
박명배 목사 (37·사랑의교회 목양사역)

시중에 나와있는 큐티지들을 앞에 펼쳐놓고 30대 후반 목회자 셋이 11월 27일 한자리에 앉았다. 큐티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과 목회적 관심을 얘기하고 또한 큐티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 그리고 건설적인 비판을 하기 위한 자리였다. 앞에 놓여 있는 다양한 정기간행 큐티 교재들을 이것저것 훑어보기도 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눈 대화이다.

박명배
많군요.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세 명 목회자 모두 큐티지 숫자가 예상외로 많다는 데 놀라움을 표현했다).

김동문
출판사의 상업성이 큐티 교재 양산의 주요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전도’라는 좋은 슬로건을 내걸고 사실 교재 장사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비슷비슷한 교재들을 여기 저기서 내놓는 것보다 차라리 연합해서 하나의 책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상술이 “큐티 바리새인”들을 양산하지요.
그렇다고 기독교 출판사들에게 상업적 이윤 추구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는 상업성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이, 한국 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큐티지는 불가능하더라도, 교단 차원에서는 공신력있는 큐티지를 발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동욱
교단에서 큐티지에 관심과 이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주석과 묵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성 세대에게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어쨌든, 교단에서 그런 욕구를 과감히 수용할 방안을 모색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동문
큐티지가 ‘만들어진 사람’을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교재에 실려있는 본문을 빼고 옆에 나와 있는 해설 부분만 읽어버리면 되는 식으로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교재가 필요합니다.

김동욱
옳은 지적입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훈련을 가르쳐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하고 있는 성경 공부는 영성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무비판적으로 주입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한 인문주의자나 똑똑한 이단을 만나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무엇을 묵상해야 될지 모릅니다. ‘왜’라는 질문이 안 나옵니다.

박명배
같은 맥락에서 성경 다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성경 다독이 신앙의 변화와 역동성을 가져오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몇 번 읽었나, 그 횟수와 믿음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성경 통독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김동문
저도 정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통독은 자칫 현대적 바리새인을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나 적용과는 상관없이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거지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니까 ‘판단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목회자로서 큐티를 어떤 식으로 하시는지.

김동문
우리 교회에서는 주보에 매주 성경 본문을 택해서 한 장씩 읽고 문답을 하는 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역 예배에서 같이 나눕니다.

김동욱
저는 개인적으로 전에 한 5년 동안, 나중에 안 것이지만 큐티라는 것을 이미 하고 했습니다. 특별한 교재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큐티를 강조하는 선교 단체같은 베이스는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큐티를 한 셈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본문을 보는 시각이 ‘물들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한 3년 정도 말씀을 묵상하고 나서야 큐지 교재라는 것을 봤습니다. 그렇다고 큐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큐티가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영성의 기본이 큐티가 아니겠습니까? 통독은 사실 머리에 별로 남지 않습니다. 전도사 시절에, 그때 통독이 유행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가까이 하는 데는 역시 큐티가 좋습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과 큐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큐티는 묵상, 즉 해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성경 책만 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문학적인 훈련이 안 된 사람에게 큐티가 가능할까요? 그런 경우, 큐티가 신비주의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큐티가 주관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김동욱
인문학적 훈련이란, 다시 말씀 드리자면, 텍스트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는 교육을 말합니다. 묵상은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육이 인문학 훈련이 약한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입니다. 큐티를 확산시키기고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들과 큐티를 해도, 자기 해석을 못합니다. 토론에 약하기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쉽게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바리새인을 양산하지요. 거듭 말씀드리자면, 인문학적인 ‘창조적 읽기’가 큐티의 전제라고 할 수 있지요. 창조적으로 물을 때, 말씀이 우리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였는데, 한번은 어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큐티가 신비주의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지적을 좀 과한 표현으로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자 모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격렬하게 항의를 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지요.

◇큐티가 때로는 짐이 되는 것도 현실인 것 같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아주 모범적인 소그룹 리더의 ‘너 오늘 큐티 했니’라는 말이 가지는 중압감이란…(모두 웃음).

박명배
사실 큐티를 안 하면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규칙에 매이면 안될 것입니다. 믿음은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체력 관리에 다양한 방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큐티든 무엇이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성경이 ‘사제’에서 ‘모든 사람’에게 오픈되었습니다. 그런데 해석은 ‘교역자의 몫’이라는 인식이 잔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성 교회에서는 제대로 묵상할 수 있는 능력을 교인들에게 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훈련이 없으니 성경 말씀에 대해서 신비적으로 경도되거나 너무 비판적으로 경도되는 것입니다. 중세와 달리 평신도에게 성경이 오픈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살필 수 있도록 훈련이 필요합니다. 평신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종교개혁이후 큐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는 ‘도구’라고 할 수 있지요. 도구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요. 큐티를 협의적 정의에 한정하여 생각하면 강박에 빠질 수가 있겠죠.

김동욱
어떤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거의 신학과 커리큘럼 수준인 것을 본 적 있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신학적 훈련이 있어야 큐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동문
그래도 최소한의 틀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도 포스트모더니즘에 젖어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프레임(틀)은 있어야 될 것입니다.

박명배
제자훈련 안에서 스스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제대로 큐티 훈련이 될 겁니다.

김동문
사실 큐티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어나자마자 학교가야 하지, 출근해야 하지. 너무나 바쁩니다.

박명배
시간을 들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묵상인데 조용한 시간에 집중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읽어버리는 묵상이야 바쁜 시간에도 가능하지만 조용한 시간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김동문
큐티는 꼭 ‘조용한 시간’(quiet time)에만 해야 하나요? 언어적 의미에만 매달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명배
물론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9시 뉴스보시고 성경 읽으시고 주무십니다. 저는 그분께 ‘큐티’라는 것을 해야 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신앙을 영위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30대 후반 목회자들인데, 현재 한국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를 하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50대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분들은 큐티에 대해 대부분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큐티 하지 말라’고 하셨던 분들이지요. 지금 3, 40대 목회자들이 대학부에 있을 때 지금의 50대 목회자들이 그 대학부 담당 사역자를 했지요.
문제는 큐티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세대가 아니라, 3, 40대 목회자들이 하루에 큐티 30분하고 말씀 연구와 영성 관리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큐티가 오히려 보다 깊이 있는 말씀 연구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예기입니다.

김동욱
목회자들의 경우 또 이미 생각이 굳어져 있어 말씀을 읽어도 2, 3년 전 생각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나가면서 자기 확신만 강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큐티 10년 해도 자기 확신이 안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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