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첫 겨울 맞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성탄소망

전쟁터가 돼버린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나탈리아, 막심, 아나스타샤(사진 왼쪽부터). 의지할 데 없던 이들에게 광주의 교회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고 친구가 돼주었다.
전쟁터가 돼버린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나탈리아, 막심, 아나스타샤(사진 왼쪽부터). 의지할 데 없던 이들에게 광주의 교회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고 친구가 돼주었다.

지역교회들 도움으로 전쟁의 상처와 소통의 장벽 극복하며 한국생활 적응 중

침공 멈추고 평화 회복된 고향에 돌아가고파…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해주기를

“엄마 아빠가…보고 싶어요.”

나탈리아(28세)의 얼굴에서 툭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인터뷰 내내 웃는 표정으로 자기소개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녀였지만, 고향 하르코프에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무너지고 말았다.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전혀 들어오지 않는대요. 우크라이나의 추위는 한국보다 얼마나 혹독한지 몰라요. 가족들이 무사히 이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몹시 걱정이 돼요.”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곁에서 통역을 해주던 아나스타샤도, 자신의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던 막심도, 나란히 앉아 대화를 듣고 있던 석창원 목사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광주광역시 월곡동의 작은 공간에 내려앉았다.

이들은 석창원 목사가 섬기는 사단법인 무지개다문화가족의 한글교실을 통해 만난 사이다. 각자 살던 곳도, 인종도, 나이도, 한국에 오게 된 사연들도 달랐지만 ‘우크라이나 전쟁난민’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이 그들을 한 곳에 모이게 했다.

무지개다문화가족을 섬기는 석창원 목사가 난민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종전과 평화를 기원하며 간구하고 있다.
무지개다문화가족을 섬기는 석창원 목사가 난민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종전과 평화를 기원하며 간구하고 있다.

“어서 집에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겨우 마음이 진정된 나탈리아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난 5월 한국을 찾아와, 공장을 다니며 조금씩 버는 돈으로 힘들게 생활한다는 그녀는 전쟁이 그치는 대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같은 질문 앞에서 막심은 얼른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나탈리아와 달리, 막심은 온 가족이 함께 탈출해 광주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는 아직까지 17세 소년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막심이 살고 있던 크림반도에서는 러시아군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연일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힘껏 귀를 막아도 여지없이 고막을 파고들던 파열음,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끔찍한 기억을 새겨준 곳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을 아직 쉽게 내릴 수가 없다.

막심의 이런 스토리를 기자에게 대신 전해주던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급속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려인 출신 남편을 따라 6년 전 한국에 왔다. 남편은 건설회사에서 근무하고, 자신은 통역과 번역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던 어머니를 지난 6월에 모시고 왔어요. 하지만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걱정을 여전히 떨칠 수 없었죠. 그런데 며칠 전 제가 살던 동네에 폭격이 있었다는 거예요. 건물들이 파괴되고, 가까운 사람들 여럿이 죽거나 다쳤다는 슬픈 소식이었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왜 이런 일들이 생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세 사람 모두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지만,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온갖 위험과 수모를 겪으며 재산과 가족을 잃기까지 한 다른 난민들과 비교하면 별다른 탈 없이 정식 절차를 밟아 한국에 올 수 있었던 이들의 처지는 훨씬 나은 편이다.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들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된 광주에는 전쟁 이후 약 800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찾아왔다. 전국적으로는 2500명 정도의 난민들이 입국한 상태라니 인천 안산 등 수도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광주에 모여 사는 난민인구가 가장 많은 셈이다.

이들 중에는 급하게 국경을 넘느라 변변한 옷가지도 챙겨 나오지 못한 경우나,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들마저 빼앗겨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미 전쟁으로 모든 터전이 파괴돼버려 소망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폴란드 등 인근 국가들로 흩어져 난민캠프를 전전하거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이들이 광주를 안전한 피난처로 삼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지역의 교회와 선교단체들이었다. 개전 직후부터 광주고려인마을과 지역 다문화교회 및 선교단체들을 중심으로 난민들의 국내 입국을 돕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이주민종합지원센터와 우크라이나전쟁피해동포지원네트워크를 통해 난민 지원 활동을 펼쳐온 갓플리징교회 전득안 목사.
이주민종합지원센터와 우크라이나전쟁피해동포지원네트워크를 통해 난민 지원 활동을 펼쳐온 갓플리징교회 전득안 목사.

다문화사역을 전문적으로 펼쳐온 갓플리징교회(전득안 목사)도 그 중 하나였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우크라이나전쟁피해동포지원네트워크에 참여해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을 위한 항공권 지원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이들이 무사히 광주에 도착하자 각종 상담과 서류대행에 광주기독병원 등과 제휴를 통한 의료지원까지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교회 부설기관인 세움과나눔 이주민종합지원센터는 난민들을 위한 심부름센터 겸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무지개다문화가족도 마찬가지이다. 난민들이 직장을 구하려 해도, 자녀들을 한국학교에 입학시키려 해도, 하다못해 간단한 서류하나 떼려 해도 언어장벽이 가장 난감한 문제이니 일상의 통역과 번역에 도움을 준다. 난민들이 직접 한국어를 배워 활용할 수 있도록 한글교실도 운영한다. 지금은 다른 난민들을 도와 맹활약 중인 아나스타샤도 바로 이 한글교실 출신이다.

석창원 목사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들어와 한글교실 수강생이 크게 늘면서 3개 반을 한꺼번에 가동해야 할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사역도 벌이는데, 인근에서 활동하는 세 곳의 예장합동 소속 다문화교회들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라고 밝힌다.

나탈리아는 하상기 목사가 섬기는 운남우리교회에서, 막심은 광신대를 졸업한 고려인 출신으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막심 목사의 임마누엘교회에서 각각 신앙생활을 하며 한글학교에 다니는 중이다. 한국어에 익숙해지면 막심은 다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칠 예정이고, 나탈리아는 계속 공부해 아나스타샤처럼 통역과 번역 전문가로 활동할 꿈을 꾼다.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암울했던 2023년도 어느새 서서히 저물어간다. 우크라이나에서 전해오는 소식은 아직 답답하고 불안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성탄과 새해에는 뭔가 다른 일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도 품는 세 사람이다.

어떤 성탄선물을 받고 싶으냐고 물으니 역시 세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멈추고 평화로운 세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맑은 하늘이 열리기를 기도해주세요. 총성 대신 웃음소리가 가득한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교회들이 함께 해준다면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질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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