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김해영 선교사가 삶으로 써내려 간 성탄 인사

척추장애로 134센티미터의 작은 키, 가난한 집안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분노조절을 못하는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 사이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유년 시절,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작한 월급 3만원짜리 식모살이, 우연찮은 기회로 직업학교에서 배우게 된 기계편물 기술로 전국기능대회와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 1위 입상, 14년 아프리카 보츠와나 선교 활동,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와 백석대학교 선교학 박사,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여기까지만 해도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김해영 선교사(57세)의 진면목은 그런 입지전적 과정이 아니라, 도리어 낮아짐과 비움에 있다. 인간의 몸으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의 계절에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편집자 주>

김해영 선교사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많은 저주와 학대, 폭력을 경험했지만 그것들이 자신을 삼키지 못했다며, 그 이유가 그것들보다 자신을 더 괴롭혔던 극심한 허리통증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십 킬로그램의 돌을 짊어진 사람에게 조그만 돌멩이 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불의의 사고로 신체장애를 입게 됐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 장애가 도리어 자신을 살리는 힘이 됐다고 고백했다./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m

“17살 편물공장에서 일할 때였어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는데, 공장에 다니는 또래들을 전도하고픈 마음에 며칠 전부터 졸라 성탄절 이브 밤 11시에 교회에 데려갔죠. 그런데 교회 전도사님이 저한테는 인사도 안하고, 제가 데려온 비장애인 친구들만 반가워하시는 거예요. 친구들이 그 모습에 제 눈치를 보더니 그냥 예배당을 나가더라고요. 너무 가슴이 아팠죠.”

김해영 선교사가 기억하는 성탄절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날 교회에서조차 자신을 장애인으로 인식하는구나 싶어 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그 절망을 거슬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했어요. 원망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그때 내린 결론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였어요. 그때부터 혹 교회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무시하든 함부로 하든 상처받지 않겠다, 교회를 떠나지 않겠다 결심을 하게 됐어요.”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전도’에 대해서도,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선물하는 것보다 더 기억해야 할 것은 결국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에게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본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예수를 닮아가겠다 결심한 삶은 이십대 중반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실현됐다. 그 무렵 그는 국내대회는 물론 국제기능대회에서도 일등을 수상한 명실공히 기계편물 분야 최고 기술자였다.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고, 대학에 가고픈 꿈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기독교잡지에서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전영창 선생의 ‘직업 선택 십계명’을 읽게 됐고, 그중 하나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는 가르침에 눈이 번쩍 띄었다. 동시에 눈에 띈 것은 한국 선교단체가 세운 아프리카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편물교사 자원봉사자를 뽑는다는 광고였다. 그는 그 광고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알았다.

김해영 선교사는 희망이 없어 절망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삼포세대니, 칠포세대니 하는 것은 다 외부기준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 자신이 존재하는 힘을 발견하길 바란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예수님을 믿은 열다섯 살 때 단추가 잘 끼워졌고, 내가 누구인지 정의가 되고 이해가 됐다”고 조언했다.
김해영 선교사는 희망이 없어 절망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삼포세대니, 칠포세대니 하는 것은 다 외부기준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 자신이 존재하는 힘을 발견하길 바란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예수님을 믿은 열다섯 살 때 단추가 잘 끼워졌고, 내가 누구인지 정의가 되고 이해가 됐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시작된 보츠와나 직업학교에서 그는 4년 간은 편물교사로 살았고, 이런저런 사유로 한국 선교사들이 다 떠난 학교를 지키며 이후 10년 간은 교장으로 사역했다.

“장애인의 몸으로 보츠와나에 간 것부터가 세상이 보기에는 바보 같고, 미친 짓이었죠. 선교사들이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을 때는 나도 한국으로 나오고 싶었고, 나올 수도 있었죠. 그러나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학생들의 간청에 도저히 떠나올 수 없었어요.”

보츠와나는 그가 첫 번째 낮아짐과 비움을 실천한 곳이자, 연단을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 땅에서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깊은 고독과 고난,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손에 잡힐 듯 대면했다.

“성경을 123번 통독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어요. 그 후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헷갈림이 없어요. 뒤돌아보면 보츠와나로 가던 이십대의 저는 손에 쥐었던 금을 털어버리고, 다른 손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쥔 셈이에요. 하나님께서는 14년 동안 그 원석을 다듬어내신 거죠.”

그가 보츠와나를 떠난 것은 교장으로 한참 안정되게 사역을 하고 학교도 승승장구할 때였다. 아무 간섭할 사람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졌음을 발견했다.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안 찾아도 되는 때였어요.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됐죠. 주저하지 않고 처음 보츠와나에 갔을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나왔죠.”

그렇게 그는 두 번째 비움을 실천했다. 그 후로도 그의 낮아짐과 비움은 계속됐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쳤을 때는 미국에 계속 남아있을 수도 있었지만,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년여 동안 부탄 선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 2012년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 소임을 맡아 케냐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책 출간과 연이은 방송 출연, 국민훈장 목련장과 KBS감동대상 희망상 수상 등으로 한참 대중들의 관심을 받던 때였다. 그때도 그는 세상의 주목을 뒤로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지난한 삶의 대가를 금과 은에 두지 않고 낮아짐과 비움으로 자신을 부인해 온 그는 앞으로도 전 아프리카 보츠와나 굿 호프 직업학교 교장이자,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케냐) 본부장으로 케냐와 한국을 오가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할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자신의 삶은 하나님만이 쓰실 수 있는 드라마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위한 공공재산’이라며, 최근 펴낸 책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아> 마지막 구절을 읽어주었다.

“내가 겪은 캄캄한 밤으로 인해 누군가가 빛을 보게 된다니. 사람으로 오길 잘했다. 그 많은 시절의 어려움을 잘 견디고, 아프리카에 사는 해영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했어. 자, 이제 또 다른 해영이를 찾아보자’라고.”

그의 바람대로 칠흙같은 어둠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승화해 세상을 밝혀갈 이 땅의 해영이들을 응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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