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1996년에 출간하고 이듬해 영화로 만들어진 김정현의 장편소설 <아버지>. 췌장암 말기인 그 아버지는 남은 가족들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한다. 그리곤 친구 의사의 도움을 받아 삶을 마감한다. ‘존엄사’ 또는 ‘안락사’를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다.

지금 프랑스에서는 존엄사 논란이 한참이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멈추고 수면유도제를 투여하는 것만 허용하는 프랑스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그래서 안락사를 위해 인접 국가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안락사를 찬성하는 마크롱 대통령이 사회적 논의에 불을 붙이고 있다.

연명치료 등으로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의사의 도움으로 삶을 끝내고 싶은 사람이 늘고 있기에 나오는 논란이다. 인간 존엄을 유지하며 죽고 싶다는 희망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에 관련한 의식이 지난 7월 여론조사에 나타났다. 소위 ‘조력존엄사’ 법안에 찬성하는 비율이 82%다. ‘자기 결정권 보장’과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 그리고 ‘가족의 고통과 부담’을 덜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여론이나 현행법이 어찌되었든 성경적인 존엄사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다.(시 116:15) 그 분을 믿는다면 죽는 순간보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존엄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스데반의 죽음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참했다. 그러나 그는 눈이 열려 하늘 보좌의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용서를 빌고 주님께 자신을 받아주시길 기도하면서 잠자듯 떠났다. 이보다 더 존엄한 인생이 있을까?

우리 교회를 섬기시던 장기려 장로님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1995년 성탄절 아침에 천국 가신 그 분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을 때 ‘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장례식 역시 큰 도전이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 도로까지 몰려든 조문객 중에는 직접 장로님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이 그들을 불러 모았다. 존경스러운 삶이 존엄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