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지난 주간, 시찰 소속 목사님들을 제주도로 초청했다. 마지막 날, 제주도에 남긴 이기풍 선교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장로교 목사이자 최초의 선교사인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분이다. 1908년 2월 배가 난파되는 등의 어려움을 딛고 제주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선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교사에겐 음식을 팔지 않고 잠자리도 제공하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그가 해안에 쓰러졌을 때 그를 구해준 해녀가 복음을 받으면서 복음의 꽃이 피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역경 속에서 1916년까지 제주도에서 밀알 역할을 했다. 그 후 1927년 다시 찾은 제주에서 1931년, 65세가 되기까지 사역을 이어갔다. 제주를 뒤로한 후 전라도의 여러 섬을 찾았다. 그러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1942년 순교했다.

그런 선교사님을 만나보고 싶어 1998년에 건립된 기념관을 찾았다. 그런데 충격이었다. 거기엔 그 누구도 없었고 문은 굳게 잠겼다. 기념관 앞뜰은 온갖 잡초로 가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황폐한 상태였다.

20년 전의 가족여행이 떠올랐다. 두 아이를 위해 기념관에 들렸지만 아픈 가슴으로 돌아온 기억이다. 문은 열려있었지만 전시물이 바닥에 뒹구는 등 엉망이었다. 두 아이에게 선교사님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후 기념관을 정비하고 관리 주체도 새롭게 선정하였다고 들었었는데 다시 이런 모습이라니?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었지만 제주의 교회 중 하나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이렇게 방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곳을 뒤로하고 관리가 매우 잘 되고 있는 ‘김만덕기념관’을 방문해보니 더 안타까웠다.
하긴 ‘오늘’의 교회조차 건강하게 지켜가기 힘들어하는 우리가 아닌가? 그러니 ‘과거’를 어찌 빛나게 유지할 수 있을까 싶다. 그 무성한 잡초는 오늘의 교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많이 불편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이기풍 선교사님을 향한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살지도 못하는데다, 그 숭고한 정신을 관리조차 못하는 우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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