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새벽기도를 마치면 아내와 함께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곤 한다. 1시간 가량 걷는 동안 신비한(?) 일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말을 섞지 않는다. 자기 길을 갈 뿐이다. 그런데 강아지와 산책하다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을 트게 된다.

강아지가 예쁘다거나 만져도 되냐는 등의 말이다. 강아지의 나이를 묻기도 한다. 강아지가 이렇게 묵묵히 지나가 버릴 타자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매개가 되리라고 기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강아지가 그 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얼굴을 대해도, 한 공간에 오래 서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마디도 섞지 않는다. 공연히 말을 걸었다가는 오해를 사거나 민망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화는 물론 미소조차 짓지 않던 사람들에게 강아지가 말을 걸게 하는 것이다.

강아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강아지가 뭐라고? 이제는 하찮게 여길 동물이 아닌 반려견의 자리에 올라갔기 때문인가? 강아지가 생각도 못한 역할을 해낸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하긴 요즘 강아지만 데리고 홀로 사는 사람들은 강아지와 말을 하고, 공감을 하기도 한단다. 그렇게 곁에 아무도 없는 외로움을 견딘다고 하니 강아지를 비롯한 반려동물의 역할이 매우 넓어진 것 같다.

강아지 등의 반려동물을 통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생각하다 보니 인간 세상이 서글퍼진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따뜻하게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고 금방 친해지던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담쌓기를 시작했다. 만원버스에 앉아서 앞에 서있는 여성의 무거워 보이는 핸드백도 받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친절을 베풀라치면 오해라는 부메랑이 날아온다. 

다시 따뜻한 대화와 눈인사가 회복될 수는 없는 것인가? 강아지라도 끌고 나가지 않으면 이웃 간의 두텁고 높은 담을 헐기가 어려운 것인가? 그래서 오해를 사더라도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처음 보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던 주님의 마음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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