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의로운 재판장 앞에 설 그날 기대하며 끝까지 경주합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호용한 목사(옥수중앙교회)

오늘날 우리 주변에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을 보면 반듯하게 품위를 지키며, 일관성 있게, 초심을 잃지 않고 평생을 달리는 사역자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예외적인 인물을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심정과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 사역의 초점을 두고 사명을 감당했을까요?

우리가 목회자이든 평신도 사역자이든 바울은 최고 최선의 모델 사역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평생 그의 선교 여행을 통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아무런 스캔들 없이 사역을 마쳤다는 의미에서도 사역자의 모델일 수 있지만, 또한 한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달렸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역자들의 롤 모델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인생 마라톤이 거의 끝날 무렵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서서히 느끼는 시점이 된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로 그 시점에서 그는 아주 유명한 고백을 남깁니다. 7절에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열심히 달려왔다고! 그리고 나의 믿음을 지켰다고.”

계속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면류관이 누구에게 예비되었다고요?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면류관’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특정한 왕만이 쓰는 면류관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유형의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면류관을 가리킵니다.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약속된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들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먼저 꼭 구해야 할 면류관, 꼭 받아야 할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왜냐하면 의의 면류관이 없이는 다른 면류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요?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의’인 것입니다. 죄란 한마디로 말하면 의가 결핍된 것이며, 의롭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죄는 곧 불법이고 불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의로우신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심오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바로 그 놀라운 비밀이 ‘의의 면류관’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구세주’ 곧 ‘그리스도’로 만났습니다. 예수를 ‘주여!’라고 부르던 바로 그 순간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 때 사도 바울에게는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신분상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불화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면 의로우신 하나님과 어떻게 될까요?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시고, 거룩한 피를 흘리심으로 내가 받을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을 더 보세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내가 뭘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실 때문에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공로를 세우고, 공적을 세우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한 일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신은 ‘의인’이 되셨습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였다면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는 신분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 교리를 ‘칭의의 교리’라고 합니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네 죄는 용서 받았고 너는 의로운 자야. 의인이야!”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은 의인입니까? 의인이 아닙니까?” 의인이란 확신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신분상 의인으로 삼아 주시고, 그 다음에 의인다운 의인이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여러분은 분명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모함으로 의인다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인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중 ‘팔복’의 가르침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레미야 23장 6절에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의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주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도록 사모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의롭게 살아야지’라는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단을 통해서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義)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냥 예수님께 빠져 살면 됩니다. 그분이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어 그분을 가장 사랑하고, 그분을 그저 좋아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을 따라가고, 그분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면 어느 날 내가 의의 길을 걷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따름으로 의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면류관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함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시면 바울은 자기 인생의 경주를 마친 후 면류관을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면류관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합니다.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의의 재판장이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멸망의 심판, 정죄의 심판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말씀을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난다’고 쓰여 있습니다. ‘심판대’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베마’라고 합니다. ‘베마’란 경주가 다 끝난 다음 심판대 앞에 설 때, 바로 심판관이 앉는 자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멸망시키는 심판이 아니라, 1등 2등 3등을 가리고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고 적당히 믿는 사람이 있으며, 부지런히 믿는 사람이 있고 아주 게으르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 서는 날 똑같이 대접을 받으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경기하는 자들이 피 눈물 흘리면서 연습하고 훈련받는 이유는 경기장에서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싸움을 다 싸우고, 베마의 심판대 앞에 서서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제 인생을 마칠 무렵, 자신이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을 사모하십니까? 그날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우리의 남은 인생 경주를 어떻게 뛰어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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