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길을 걷다보면 육교와 지하보도를 곳곳에서 쉽게 만나던 시절이 있었다. 보행자의 안전보다는 차량운행의 효율성을 위한 구조물이었다. 노약자의 보행권 희생을 담보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자동차가 훨씬 많아졌지만 육교 등의 구조물은 거의 찾기 어려워졌다. 대신 도로 곳곳에 횡단보도가 늘어났다. 심지어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에 X형 횡단보도까지 생겼다. 사방의 모든 차량을 정지시킨 채,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대각선으로도 쉽게 건널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차량은 2500만대를 넘어섰다. 그런데 그 많은 차량보다 사람을 위한 교통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많은 자동차 사이에서 불편해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보다 차량이 우선인 세상은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자동차가 많더라도 선진사회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자동차여야 하는데 그 가치가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되어야만 건강한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역시 그렇다.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한국교회의 부흥기에는 ‘교회를 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컸다.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을 신앙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위해 일하신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기껏 한다면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목사인 나 역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교인이 목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가 사람을 뜨겁게 섬길 때 나타나는 열매여야지 교육의 결과나 도그마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위해 사역하는 목회자는, 교인들 역시 사람을 위해 살아가도록 격려할 것이다. 사람이 교회를 위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위한 교회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때 이 땅의 교회는 그 위상이나 존재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집 앞의 서초역 사거리를 건너려면 지하 통로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그 위에 횡단보도가 생겼다. 편리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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