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초등학교 5학년 말 아버지의 사업이 휘청거리나 싶더니 모든 것을 잃었다. 당시 살던 약수동의 크고 안락한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은 동네로 이사했다. 기찻길도 있던 성북구의 한 동네였다. 그런데 점점 더 기울더니 그 작은 집마저 잃고 셋방살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약수동에서는 불과 5분 거리였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사들이 다녔다는 장충초등학교. 버스를 두 번씩 타야 하는 먼 곳으로 이사 온 후에도 통학의 고통을 안은 채 그 학교를 고집했다. 난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청계 6가까지 한 번만 탄 후 거기부터는 걸어서 학교를 갔다.

그러던 6학년 하굣길. 버스를 타려는데 주머니 속의 버스표 한 장이 사라졌다. 어디서 흘린 모양이다. 고민 끝에 걷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었다. 버스로도 40분 이상 가야 하는데 걸어갈 생각을 하다니 참 뭘 몰랐던 것 같다. 동대문, 신설동, 종암동을 지나 캄캄해진 후에야 집에 들어섰다. 서울 전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금이야 조금 더 가까운 길을 알지만 그때는 버스 노선만 따라 먼 길로 집에 왔다. 참 힘들었던 기억이다. 어머니가 93세로 천국가실 때까지도 걸어서 집에 왔단 말은 못했다. 요즘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가 버스비를 빌려달라고 할 때 두 말 않고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아픈 추억 때문일 것이다.

참 건강했던 모양이다. 아파서 학교를 못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힘들게 대학원을 마친 후 석사 정훈장교로 군대에 갔다. 12주 동안의 훈련기간 중에 뛰고 걷고 굴러도 그렇게 지치지 않았다. 잘 버텼다. 드디어 마지막 코스, 모두가 걱정하던 유격! 그러나 별 문제 없이 통과했다. 그 빡세다는 유격행군이나 극기훈련 같은 과정을 잘 마치고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아, 그때다. 초등학교 6학년 그때 난 걷는 훈련을 한 것이다. 지금도 교회 4층 또는 5층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고된 시절이 오늘의 나를 탄탄하게 훈련시키지 않았을까? 비록 다리는 남만큼 길지 않아도 걸음만은 빠른 이유도 그것이겠다 싶다. 그 먼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던 버스표 한 장이 내게 안겨준 선물이랄까? 고생은 고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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