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중 하나가 죽일 것 또는 버릴 것과 살릴 것 또는 지킬 것을 고르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해도 데스크에 의해 버려지는 기사가 있다. 그런 경우 ‘킬’ 당했다고 한다.
때로는 ‘킬’ 당할 것을 알면서도 열정적으로 취재하고 그것을 근거로 죽어라고 써댄다. 그렇게 쏟아 부었기에 ‘킬’ 당하면 더 아플 것 같은데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뿌듯한 모양이다. 죽을 줄 알고도 뛰어들고, 손해 볼 것 같아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내는 그런 태도 없이 어찌 세상사는 맛이 있겠는가?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킬’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스스로 ‘킬’할 것을 ‘킬’하고 살릴 것은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 일생을 품고 살던 것도 ‘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짊어지기 힘들고 어렵더라도 ‘킵’해야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지켜내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리라.
나는 종종 ‘킬’할 것과 ‘킵’할 것을 제대로 구별하고 사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킬’할 것을 그렇게 오랫동안 움켜쥔 채 벌벌 떨다가 결국에는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편안해진다. 진작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을.

또 ‘킵’해야 할 것인 줄 알면서도 너무 힘들어 놔버린 채 엉뚱한 것에 매달리기도 한다. 뒤늦게 뒤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허탈해지기도 한다.

내 평생 ‘킵’한 것은 무엇이며 ‘킬’한 것은 또 무엇일까? 그것이 뒤집힌 채 ‘킬’과 ‘킵’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때는 또 얼마인가 싶다.

내가 28년간 붙들고 살아 온 이 교회. 그러나 그것 역시 내가 뛰어나서 ‘킵’한 것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는다. 사실 주님이 ‘킵’ 해주셨기에 버텨온 것임에도 내가 ‘킵’하고 있었다고 착각한 나머지 공연히 손에 힘만 주며 힘겹게 산 것 같다.

그런 은혜를 입은 난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각과 가치를 든든히 지켜내야 할 텐데. ‘이제라도 그래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으니 철드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킬’하시지 않고 ‘킵’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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