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선교적 전망과 과제①
최하영 선교사(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은 정교회 신앙이 가득하다. 사진은 한국교회 봉사단의 우크라이나 난민 구호 장면.
우크라이나인들은 정교회 신앙이 가득하다. 사진은 한국교회 봉사단의 우크라이나 난민 구호 장면.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전방위적으로 320발의 주요 군사시설에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 달 반 지난 시점에서 과연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어떠하며, 그들의 저항이 어디서 오며, 향후 선교적인 전망과 과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올레그(879∼912)가 882년 루시 공국을 키이우에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의 3대 도시가 런던과 파리, 키이우였을 만큼 루시 공국은 유럽에서 영향력이 있는 국가였다. 그런데 이 공국은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1240년 몽골군은 키이우를 초토화시켰다. 이때부터 우크라이나는 약 750년간 외세의 직간접 지배를 받아왔다. 240년간은 몽골 금호르드의 지배를 받았다. 1569년부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이 우크라이나를 가톨릭화하려 하자 우크라이나 정교회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봉기의 지도자였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1654년 1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모스크바 공국을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1686년 모스크바 공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다. 양국은 ‘영원한 평화’ 협정을 맺어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동쪽은 러시아가 서쪽은 폴란드가 통치하게 됐다. 이렇게 우크라이나는 1991년 8월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337년간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 서쪽은 친서방, 동쪽은 친러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크림반도가 역사적으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문화적 요충지가 된 것은 바투 칸을 따라왔던 크림 타타르족이 1430년에 크림칸국을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들어온 지 약 100년만인 1783년 예까제르나 2세(1762∼1796)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주정부인 자파로지예 자치구를 파괴하고 군통솔자인 헤트만을 해산시키고 크림칸국을 복속시켰다. 그 후 러시아는 이 크림반도를 지켜내고 위해 제1차 연합국과, 제2차 오스만 투르크와, 다시 제3차 연합군과 크림전쟁을 하였다. 러시아는 베링해협과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지만 해양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한계가 있어 크림반도를 가져 흑해를 지배하고자 했었다. 그런데 1954년 우크라이나와의 수교 300년 주년을 기념하여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가 크림반도를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에 우크라이나 동부 쪽 땅과 교환하였다. 사실 이 교환도 우크라이나인들의 큰 희생을 치른 대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우크라이나는 3년간(1941∼1944) 독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때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앞세워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다. 또 그에 앞서 1931∼1933년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으로 한 해 동안 농사가 금지되었고 그 다음해에 기근이 오면서 우크라이나인 800만명∼1000만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렇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지배한 4세기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의 가슴에는 깊은 한이 맺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여준 그들의 저항의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블라디미르 1세(980∼1015)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면서 988년에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등 동슬라브인들이 정교회 신자가 되는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868년 시릴(827∼869)과 메도디우스(815∼885) 형제가 선교사로 슬라브 문자를 고안하여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면서 후에 동슬라브인에게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루시공국 240년간에 우크라이나인의 정신과 마음은 동방정교회의 틀에 의해 형성되어, 문학과 예술, 법률, 관습 등 비잔틴의 헬라 문명에 영향을 받아 당시 유럽에 영향력이 있는 민족이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인은 고유한 우크라이나어를 발전 계승한 수준 높은 문명국이었다. 1580년에 우크라이나어로 된 오스트리흐 성경을 발간할 정도로 우크라이나어가 발전해 왔었다. 16세기 말에 로마가톨릭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연합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교회(UGCC)을 설립할 때에 우크라이나 정교회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은 가톨릭 세력을 방어하면서 정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18세기 말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중심으로 페레미슬 서클이 생겨 우크라이나어로 된 기도서와 입문서를 출판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1840년 세브첸코가 코브자르를 출판하여 우크라이나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22년 러시아 정교회가 아닌 우크라이나 자치 정교회(UAOC) 회의에서 예배 언어는 우크라이나어로 사용할 것과 전통적인 긴 옷과 긴 머리, 수염을 금하기로 했다. 1991년 8월 우크라이나 최고회의에서 독립이 선포되면서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예프 대주교구(UOC K-P)를 설립하여 러시아 정교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구(UOC M-P)와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서 우크라이나 내의 정교회는 UOC M-P, UGCC, UAOC, UOC K-P가 있으며 그 중 독립하면서 세워진 UOC K-P가 크게 성장하였다. 결국 2018년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완전히 분립이 되어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자체적인 우크라이나 정교회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것도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인은 태어나면서 정교회 교인이라 할 정도로 그들의 문화와 관습이 묻어 있다. 각 마을 입구에 정교회 건물이 있고 각 가정 입구 맞은편에 성화 액자가 걸려있고 그 위에 우크라이나 뿌쉬니크(정통 수건)가 걸려있다. 그래서 정교회 교회나 가정에 있는 성상은 그들의 매일의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일생에 중요한 예배 의식은 세례식과 결혼식으로 성상으로 그들을 축복한다. 또한 장례식 때에 성상은 장례 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진한다. 750년간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지 않고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정교회 신앙 정신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일상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 “영광스러운 우크라이나”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크라이나인은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은 약하나 종교적인 유대감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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