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조미수교 계기로 구한말 복음전래 봇물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330일 서울신대에서 조미수교 140주년 기념-한미관계와 기독교를 주제로 특별강좌를 개최했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정과 그 의의에 대한 재고찰을 주제로 강의했는데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과정과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박 교수는 강의를 통해 19세기 조미조약을 20세기 한국이 미국에 종속되는 첫 출발점이라고 보는 사관을 반박하고 이 조약을 제국주의의 침략적 이미지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 교수는 당시 문헌을 볼 때 조미수교는 미국이 주도했다기 보다 오히려 중국이 앞장섰다고 설명했다. 자료에 따르면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1882년의 상황은 조선을 향해 일본과 러시아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때였다. 이에 입지가 좁아질 것을 걱정한 중국은 미국을 끌어들여 조미조약을 주선하면서 일과 러를 견제하는 동시에 조약에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문구를 넣으므로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조미조약에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내용이 삭제됐으며 조약의 내용도 조선의 관세주권을 인정하고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도 엄격히 규정하는 등 조선이 여타 서구열강과 맺은 조약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불평등의 요소가 적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조선의 입장에서 조미조약은 서구열강과 관계를 맺은 첫 번째 관문이었고 이후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와 조약이 연속됐다면서 조미조약을 통해 한국은 서구 세계와 만났고 서구민주주의와 근대과학문명을 받아들였다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조선은 기독교선교를 거부했지만 결국 기독교가 유입됐고 이것은 한반도를 대륙의 문화에서 해양의 문화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선교사적 의미도 부연했다.

조미수교

박용규 교수(총신대 명예)‘1882년 조미수소조약과 한국선교의 연관성을 주제로 조미수호조약을 계기로 미국의 한국선교가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조선을 주목하지 않았던 미국은 조미수호조약을 계기로 푸트 공사를 보내 보빙사의 미국 파송을 요청했고 보빙사는 미국 방문 중 감리교 목사 가우처를 만남으로 감리교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됐다. 가우처 목사는 감리교해외선교부에 조선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감리교는 이에 부응해 1884년 맥클레이 선교사의 조선 방문을 허락했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고종황제를 만나 교육과 의료사역에 대한 윤허를 얻어냈다. 이에 자극받은 미 북장로교회도 언더우드와 알렌선교사를 파송하므로 조선 선교의 문을 열어 젖혔다. 이에 앞서 1883년 일본에서 이수정은 미국에 조선선교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이것이 미국 선교지에 기고된 일도 있었다.

박용규 교수는 “1882년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는 미국과의 수교 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의 관련성에 관심을 갖고 미국의 여러 도서관을 찾아다니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면서 조미수호조약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국선교를 위한 일련의 움직임은 마치 드라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급속히 진행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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