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위한 모든 의 이루신 예수 … 의례적 절기 준수는 무익한 일

1. 주님의 전 생애를 찬미

문병호 교수<br>(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br>
문병호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주님이 지상의 공생애를 마치신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은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어진다.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이 세 사건과 각각 관계된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주님을 영접했던 그 동일한 입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정죄했다.(막 11:10; 15:13)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왔으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인생의 패역함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약 1:8; 3:10)

주님의 대속의 의는 그의 잉태, 나심, 사심, 고난 당하심, 죽으심, 장사되심, 이 모두에 미치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자신의 전 생애 동안 준비한 흠 없는 자기를 제물 삼아 단번에 드리신 사건이므로, 그 죽으심은 그가 이 땅에서 행하시고 당하신 완전한 순종의 의를 모두 함의한다. 혹자는 이를 ‘십자가의 제유법’(提喩法)이라고도 한다.
복음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 및 가르침을 모두 아우르는바, 부족한 종이 쓴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라는 시는 주님의 전 생애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감사하는 찬미였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
                                                        -문병호

날 위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이 땅에 내려 오셨네
모든 의 다 이루시고 그 의 모두 내 것 삼으셨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서 구주 되셨네
사람으로서 우리와 같으시나 아무 죄가 없으셨네

성령 잉태도 날 위함이요 구유 나심도 날 위함이요
지상 사심도 날 위함이요 애매 고난도 날 위함이요
가상 죽음도 날 위함이요 무덤 계심도 날 위함이요

죽기까지 죽음 값 무르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사셨네
부활의 몸으로 세상에 보이시고 하늘 위로 오르셨네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성령 부음으로 날 다스리시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니 주 이제 내 속에 사시네
다시 살아남도 거룩하게 살아감도 모두 주의 것이네
생명의 말씀의 빛 그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네


2. 십자가의 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우리 구원을 위한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로서 “자신을 버리사” “자기를”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드리셨다.(엡 5:2; 딤전 2:5~6) 생명이 피에 있으니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바(레 17:11; 히 9:22), 죄가 없으신 “자기 목숨”을 “유월절 양”으로 삼아 “대속물”로 주셨다.(히 4:15; 고전 5:7; 마 20:28)
“너희가 … 대속함을 받은 것은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치르신 대속의 값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였다. 그가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그 “한 번의 제사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히 9:26; 10:14)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대속의 값으로 지불되었다.(히 9:14) 그 피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드려져, 그 피로 죽음이 우리를 넘어갔다.(출 11:13)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架上) 그 피를 쏟으셨다. 십자가의 형틀에서 그의 몸이 찢겨 만세 반석이 열리게 되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그리하여 하나님이 “내가 너와 만날 곳”이라고 칭하신 속죄소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출 30:6)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바울이 성령을 받아 육체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듯이(행 9:17~18),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인다.(갈 3:1~2)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고전 1:18), 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로되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 1:24) “십자가의 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체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그 어디에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없다.(고전 2:2; 딤후 3:15)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3. 부활의 도
주님이 죽임을 당하심은 사망에 굴복하심이 아니요 사망을 이기심이다. 청교도 신학자 오웬(John Owen)이 말했듯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의 죽음으로서의 죽음” 즉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었다. 주님은 안나스, 가야바, 헤롯, 빌라도를 앞세운 “통치들과 권세들”에게 심문 받으시고 극심한 고통과 모욕과 수치를 겪으신 후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 이기셨”다.(골 2:15)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다 헛되며(고전 15:14), 십자가는 그저 미련하고 거리끼고 무능한 “걸림돌”에 불과할 것이다.(갈 5:11) ‘십자가의 도’는 죽어야 다시 사는 ‘부활의 도’이며, 썩어 열매 맺는 밀알의 도이다.(요 12:24) 주님은 죽임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세 차례나 예언하셨다.(마 16:21; 17:23; 20:19) 주님은 죽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실 것을 잡히시던 밤에 말씀하셨다.(요 16:7)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는 구원의 역사를 함께 이룬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고전 15:55~57)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므로 그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산다.(요 11:25~26) 우리에게는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과 함께 살 줄 믿는 믿음이 있다.(롬 6:8)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의 부활과 연합한다.(롬 6:5)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다.(롬 6:11) 주님의 부활로, 그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 구원의 값으로 받아들여졌다.(고전 7:23) 주님의 부활로, 십자가의 ‘죽음의 값’이 우리에게 ‘생명의 값’이 되었다.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판 주님의 “무죄한 피”가 “생명의 속전”이 되었다.(마 27:3~4; 출 30:20) 형제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나 엄청나서 인생은 영원히 마련할 수 없으나(시 49:7~8),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자기의 몸으로 그 무한한 값을 지불하셨다. 그가 우리의 형제라 불리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다.(히 2:11, 17; 갈 3:13)

4.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초대교회 사도들은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를 함께 전하였다.
“너희가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4~15)

본 설교는 그 대상이 “너희”로 지칭되었지만, 모든 말씀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죽였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 때문에’ 죽으셨으니,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명의 주”가 죽으심으로 그 죽음이 ‘우리를 위한’ 생명의 값이 되었다. 주님의 부활이 이를 인치고 확정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는 그 후속 열매가 되었다.(고전 15:20)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행 4:2)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엡 2:5; 골 2:12) 그러므로 “새 것”으로(고후 5:17) 거듭난 우리는(벧전 1:3) “그리스도의 것”이며(갈 3:29; 롬 8:9), 주님이 “값으로 사신 것”이다.(고전 7:23)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갈 2:20)

로마가톨릭과 일부 교파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사순절(四旬節)이라는 절기를 내세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례적으로 재현하고 여러 종류의 고행과 그들이 말하는 관상기도를 형식적 치레로 삼는다. 로마가톨릭이 사순절을 그들의 교회력에 따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의식주의와 자질주의에서 비롯된 유산으로서, 그 사십일 동안 행한 순례나 금식이나 미사 참여나 선행 등을 공로로 여기는 그릇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주님이 구약의 언약과 절기와 제사를 다 이루셨으므로(요 19:30), 이제는 절기에 대한 이러한 형식적 준수는 무익하고 헛되며 가증할 뿐이다.

칼빈(John Calvin)은 천 개의 나무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갈 3:1) 한 구절 말씀에 담긴 진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은 십자가를 보고자 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봄은 다시 사신 그와 함께 우리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요 14:19)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살았으므로, 우리에게는 이를 기억하고 기념할 때마다 그가 모든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값없이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신 오직 은혜, 전적 은혜에 대한 온전한 감사와 고백과 송영이 넘칠 따름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자유자의 멍에일진대, 그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울 때 쉼이 있으리니 우리가 즐거이 십자가를 지자.(마 11:29; 16:24; 갈 5:1)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이시니(행 2:36), 그 예수를 바라보자.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오직 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