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한국교회사학회-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학술대회 열려

한국교회사학회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192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된 이후 주일학교 운동의 역사와 발전 과정에 대한 발표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교회사학회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192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된 이후 주일학교 운동의 역사와 발전 과정에 대한 발표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교회사학회(회장:박경수)는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공동으로 3월 27일 한국성서대학교에서 온·오프라인 동시에 학술대회를 열고, 192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된 후 100년을 맞은 주일학교 운동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시대별로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공동 학술대회에서 ‘주일학교운동과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제목으로 주제 강연한 박용규 명예교수(총신대)는 알렌 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 9월 20일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교회 주일학교 운동을 역사적으로 정리해 발제했다.

박 교수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일학교를 처음부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받아들였다”며, 주일학교가 하나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한 시점을 1905년 장로교 4개의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그 안에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분석했다.

더불어 한국에서 주일학교운동이 교파를 초월해 하나의 연합운동 성격으로 발전한 것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계기로 한반도 전역으로 주일학교가 급속히 성장했으며, 1919년 삼일운동 이후 또 한 차례의 도약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박 교수는 “당시 사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장로교가 진흥운동을, 감리교가 세기운동(the Century Movement)을 전개하면서 주일운동이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됐다”며,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높이 평가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이것은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을 가져다 준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계기로 1921년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된 데 이어, 이듬해 1922년 11월 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정되면서 △주일학교교육 관련 문헌 출판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지속적 교류 △한국에서 전국주일학교 대회 개최 등을 통해 193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이 지속됐다.

그러나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식민정책이 강화되면서 주일학교 운동이 시련을 맞게 됐다. 특히 1938년 6월 2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체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됐지만, 해방과 함께 1947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건운동이 진행됐다. 박 교수는 “당시 한경직 목사가 해방 후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주일학교 운동은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1948년 제2회 총회에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박 교수는 “이는 단순히 주일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학교를 포함한 기독교교육 전반으로 지평을 넓혀간 것으로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의 시대적 요청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주일학교운동은 교단 분열의 영향으로 위기를 맞게 됐다. 박 교수는 “연합운동으로 진행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59년 예장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이어 감리교와 성결교가 잇따라 분열되고, 각 교단이 기독교교육국을 별도로 설치해 <계단공과> 발행과 교사훈련을 독자적으로 진행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교육을 통합하는 연합기관으로 활동과 사역 반경이 상당히 축소됐다”고 평가했다.

1960년 이후 진보주의 교단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한국 상황에서 기독교교육의 방법과 방향을 설정하려 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전통적인 성경적 가치관을 상실함으로 본질적인 성경적 신앙교육에 한계를 노정했다. 반면, 보수교단의 기독교교육은 급변하는 시대 변천을 읽어내지 못하고 시대와 동떨어진 기독교교육을 실시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지난 한국의 기독교교육의 역사는 교파주의 벽을 넘어서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성경관의 토대 위에 성경적 가치 정립과 그것의 적용, 실천을 통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책무 중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훈해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영식 교수(총신대)가 초기 한국교회 주일학교 연합활동의 발전을 장로교 사례를 중심으로 발표했다.

이영식 교수는 “교회가 성장‧발전함에 따라 주일학교 수도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학교, 하기성경학교, 성경구락부를 통한 신앙교육이 확산됐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활동이 활성화 되어 1905년 9월 한국장로교감리교연합공의회가 발족된 것도 주일학교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1911년 4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특별위원이 한국에 방문한 이후 지속적으로 국제기구와 연계한 주일학교 발전을 꾀했으며, 1913년 4월 19일 창경원에서 서울과 수도권 지역 주일학교 학생 1만47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주일학교대회가 대회장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도 아래 연합으로 열리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1920년대에는 주일학교운동 활성화를 위한 강연회가 서울, 평양, 개성, 대구 등지에서 개최돼, 불신 아동 전도를 통한 한국주일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이 교수는 평양 장대현교회와 연동교회, 광주 선교스테이션의 주일학교 등 초기 장로교 주일학교 발전의 사례도 소개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에서 평양장대현교회 소아반에 대해 1902년 성도 수가 증가함에 따라 주일학교에 성년교인들과 함께 모이던 소아반을 따로 분교했다고 밝히고 있다. 1909년 또한 평양대부흥운동의 결과 교인이 더욱 증가해 여배당이 협소해지자 주일공부를 남녀로 분리해 보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주일학교가 발전하자 1922년 10월 11일에는 13~16세 소년을 대상으로 ‘소년회’를 창설해 복음전파와 말씀 수양에 힘썼다.

연동교회는 1907년 500여 교인이 1200여 명으로 증가했고, 그 해 5월 5일 연동교회 소아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1898년 설립돼 운영 중이던 연동소학교 학생들 중 12~13세 학생들 중 12명을 뽑아 어린이전도대를 조직했다. 전도대원들은 토요일 오후마다 모여 주일 계획을 협의하고 주일 오후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전도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동소아회는 한 달만에 800명으로 10배 부흥하는 기적을 경험했고, 이후 이 전도대는 연동교회가 개척한 왕십리교회와 뚝섬교회 소아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영식 교수는 “주일학교운동에 있어 장로교 사례를 통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힘썼던 선진들의 열정과 헌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통찰과 도전을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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