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주의연구소 “성경·교회중심 전통 이어야”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오덕교 박사)가 ‘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를 시작했다. 연구소는 3월 25일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마포삼열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첫 강좌를 마련했고, 이상규 교수(백석대), 박응규 교수(아신대), 이승구 교수(합신대)가 발제를 통해 마포삼열 선교사가 끼친 영향력을 조명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모습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 1864~1939) 선교사는 장로교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다. 평양을 세계 최대 선교 지부로 발전시킨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며 한국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하노버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26세인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파송으로 내한했다. 1890년부터 1936년까지 46년간 한국의 평양을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1000여 교회와 300여 학교를 세웠다.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800여명의 목사를 배출하면서 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었다. 1907년 장로회 독노회 초대 노회장을 역임했고 장로회 총회장으로도 일했다.

이번 강좌에서 이승규 교수(합신대)는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업적을 성경중심의 복음주의 신학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우선 지적했다. 1890년 내한하자마자 자신의 집에서 사경회를 열 정도로 신앙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몸소 가르쳤다. 또 마포삼열하면 학교 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수많은 학교를 세운 것은 교육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경신학교, 숭덕학교, 숭의여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학교 설립에 관여했다.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교수요 교장으로 사역했던 것도 교육이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전수하는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승구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는 교회 중심 신학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1917년이 되자 선교사는 2선으로 후퇴하고 한국인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회의 불상사가 있더라도 교회 내에서 권징을 행사하여 시정토록 해야지, 세상으로 끌고 나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주일 성수 등을 강조하며 교회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약점도 있다고 주장했다. 마포삼열 선교사 뿐 아니라 여러 구한말 선교사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세대주의에 대해 관대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초기 선교사들이 세대주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둘째 부흥회식 예배 모범을 보였고 예배 자체의 엄숙성만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부흥회식 예배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예배의 전통이나 격식이 소홀해졌고, 예배의 엄격성이 강조되는 만큼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덜 주목했다는 지적이다.

이승구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발전에 끼친 공로는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교사들의 부정적인 신학관도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때,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교회 전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사역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 학술발표에서 이상규 교수는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 선교’를 주제로,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국 장로교회의 제도적 기초를 놓고 신앙 윤리적 표준을 제시했음을 강조했고,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1907년에 안식년 중이었지만 한국 사역 후 일관되게 개혁주의적 경건주의를 심었던 것이, 대부흥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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