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난민 선교 헌신 … “동역자 눈물과 헌신으로 열매”

신현가 선교사(오른쪽)와 남수단선교연합 이사장 김오용 목사(가운데), 황연호 목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김오용 목사는 신 선교사를 “말과 행동이 똑같은, 보석 같은 선교사”라고 평가했다.
신현가 선교사(오른쪽)와 남수단선교연합 이사장 김오용 목사(가운데), 황연호 목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김오용 목사는 신 선교사를 “말과 행동이 똑같은, 보석 같은 선교사”라고 평가했다.

“2013년에 1차 내전이 터지고, 2016년에 2차 내전이 터졌어요. 2차 내전은 바로 제가 사역하던 지역에서 일어났죠.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저도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했어요.”

신현가 선교사는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남수단 독립 초창기를 경험했다. 그는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이 독립하고 일주일 후인 7월 15일 남수단에 들어갔다. 60세가 가까운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순종했다. 그 후 원주민 마디족에 들어간 최초의 외국인이 됐고, 마디족은 그를 부락민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마디족을 상대로 선교를 하던 가운데 내전이 터졌고, 동네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주민들과 같이 국경 너머 우간다로 피난을 가야 했다.

“제가 가르치던 주일학교 여자아이 하나가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평상시 같으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전쟁통이라 치료시기를 놓친 거죠. 그때 난민 선교를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우간다 아주마니에 있는 남수단 난민정착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난민촌으로 하루에 2000∼3000명씩 난민들이 밀려들던 시절이었다. 황무지와 같은 그 땅에서 그는 구호사역을 비롯해 선교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역은 다했다. 특별히 그는 피난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눈에 밟혔다. 임시로 천막을 지어 고아들을 수용했고, 나중에는 고아원 건물을 지었다. 그 후로 유치원과 신학교를 세우고, 교회당을 여러 곳 세웠으며, 지금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구호와 섬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눈물겹고 놀라운 사역은 동역자들의 기도와 후원의 열매이기도 했다. 중국 오지 선교를 하다 알게 된 김오용 목사(동일로교회)는 남수단선교연합 이사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고, 황연호 목사(평안교회) 역시 고아원 사역 후원 등 아름다운 동역을 이뤄가고 있다.

신 선교사는 “동일로교회와 평안교회가 70명 고아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고, 고아원 아이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바자회도 열곤 하신다. 덕분에 고아원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른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지난 16일 제16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수상했다. 추천인은 난민촌을 방문했다 그의 사역에 감동을 받은 우간다 한국 대사였다. 신 선교사는 “제가 아니라 지난 10년간 숨어서 기도해주시고, 한 푼 두 푼 모아 선교비를 보내주신 분들이 받아야 할 상”이라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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