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달구벌에 작은 천국 만든 고마운 은인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 선교사

대구의 성탄절은 청라언덕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산의료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제일교회 그리고 옛 선교사들의 사택들이 자리한 이곳에서 트리의 불을 밝히는 것을 신호탄으로, 달구벌 가득히 캐럴이 울려 퍼지고 감사와 사랑이 담긴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가 넘쳐난다.

1897년 12월 25일, 역시 성탄절이었던 이날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환한 불빛도, 예쁜 장식도 없었다. 아직까지 대구 사람들에게는 ‘성탄’이라는 단어는커녕 ‘예수’라는 이름조차 생경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분처럼 살아가고 싶어 했던 한 사나이가 조랑말을 탄 채 이날 대구읍성 남문을 통해 들어왔다.

우드브리지 오드린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선교사. ‘장인차(張仁車)’라는 한국이름까지 따로 가진 이 미국인 남성은 이후 15년을 대구에서 머물며, 자신이 매일처럼 오르내리던 청라언덕 일대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갔다. 그것은 작은 천국이었다.

성탄절의 사나이 존슨 선교사가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대구 곳곳에 남아,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풍경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기독신문>은 2021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그 흔적들을 따라가는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가이드는 지난해 본지 힐링면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필자로 섬긴 오현태 목사가 맡아주었다. <편집자 주>

일찌감치 불을 밝힌 옛 예배당 마당의 성탄장식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감초 당귀 진피 등 온갖 약재가 어우러진 진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대구제일교회 역사관과 교남YMCA회관이 자리한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일대는 예로부터 ‘약전골목’이라고 불리었다. 조선 효종 때부터 거대 규모의 한약재 시장인 약령시가 형성된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도 150여 개의 한약방이 성업 중이며, 해마다 한방축제가 개최되기도 한다.

존슨 선교사가 1909년 6월 7일 대구 제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
존슨 선교사가 1909년 6월 7일 대구 제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

대구에 입성한 존슨이 처음 자리잡은 곳은 바로 이 약전골목이었다. 의료선교사인 존슨은 먼저 이 골목에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점포를 내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온통 한복차림에 한약재투성이인 동네에서, 유일하게 양복차림을 하고 사람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약품들을 다루는 인물. 그는 참 별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신의 나이 26세이던 1895년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수련과정을 거쳐 의사가 된 그는 당대의 부흥사 무디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의 길을 자원했다. 이후 미국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갓 결혼한 아내 이디스 파커와 함께 1897년 한국으로 부임했다.

존슨 선교사가 처음 대구에 찾아와 문을 연 ‘미국약방’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약전골목의 현재 풍경.
존슨 선교사가 처음 대구에 찾아와 문을 연 ‘미국약방’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약전골목의 현재 풍경.

도착하자마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했다. 12월 22일 부산 도착 직후, 서둘러 대구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의 아내 넬리 딕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존슨 부부는 쉴 틈도 없이 각각 조랑말과 가마에 의지해 엄청난 속도로 행군했다. 그리하여 불과 사흘만인 성탄절, 두 사람은 대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정통 의술을 공부한 존슨은 처음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당시 대구 일대는 한약방 말고는 의존할 수단이 아무 것도 없었던 그야말로 의료사각지대였기에, 존슨의 활약이 복음사역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선교부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존슨 선교사와 대구 제중원의 후예인 계명대 동산의료원은 코로나19사태 초창기 거점병원으로서 감염 대확산으로 위기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며 다시 한 번 감동을 일으켰다.
존슨 선교사와 대구 제중원의 후예인 계명대 동산의료원은 코로나19사태 초창기 거점병원으로서 감염 대확산으로 위기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며 다시 한 번 감동을 일으켰다.

당장 한국어를 습득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고, 가족들이 마땅히 거처할 집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의료도구 등이 포함된 짐들이 당초 도착하기로 한 부산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인천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이를 찾는 데에만 반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딸 메리 파커가 악명 높은 대구의 더위를 견디지 못해 건강이상으로 한동안 요양을 떠나는 일까지 겪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존슨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대구 부임 2년 만인 1899년 12월에 마침내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진료소를 개원한다. 이미 미국약방을 통해 서양의술의 효능과 존슨의 실력을 맛보았던 사람들은 제중원으로 물밀 듯 몰려왔다.

1900년 6월까지 불과 반년 동안 제중원에서 진료한 환자 수가 무려 1756명. 이듬해에는 그 숫자가 2000명으로 더욱 늘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격무를 존슨은 엄청난 헌신으로 감당해냈다.

존슨 선교사의 피아노가 소장된 옛 챔니스선교사 주택. 현재는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존슨 선교사의 피아노가 소장된 옛 챔니스선교사 주택. 현재는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제중원 원장으로서 그가 써내려간 공헌의 기록들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천연두 예방접종과 학질치료제 보급 등으로 당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전염병들을 하나씩 퇴치했고, 한국인 젊은이들을 뽑아 서양의학을 가르치며 전문 의료인들로 양성했으며, 최초의 제왕절개 수술 기록을 남기는가 하면, 한영중일 의학사전 제작에 착수하기도 했다.

존슨의 발자취는 그대로 제중원의 발자취가 되어 오늘날 계명대 동산의료원으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 속에서도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1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성실한 진료활동으로 지역사회로부터 커다란 신뢰를 받고 있다며 오현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지난해 코로나19가 대구·경북 일대에 대규모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계명대 동산의료원은 거점병원으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과연 존슨과 제중원의 후예라는 찬탄과 감동을 자아냈지요.”

존슨 선교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의 안내자가 되어준 오현태 목사. 대구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 옛 예배당 앞에서.
존슨 선교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의 안내자가 되어준 오현태 목사. 대구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 옛 예배당 앞에서.

동산의료원이 여전히 우뚝 서있는 청라언덕은 본래 대구 남문 밖의 황량한 야산이었다. 산신령이 산다는 고목과 무연고자들의 묘지뿐이던 이 언덕을 1899년 대구선교부가 매입해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잇달아 세우면서,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 없는 새 생명과 구원의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당연히 존슨도 그 사연들의 주인공이자 연출자였다.

해마다 수천 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으로 존슨은 복음전도자로도 활동하며 대구제일교회 설립에 한몫을 하고, 멀리 김천과 구미에까지 다니며 순회전도 사역을 펼쳤다. 과로로 건강이 나빠져 병원사역을 완전히 중단한 1910년부터는 아예 복음사역에 전념하며 수많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한편으로는 제중원에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따로 초가를 구입해 진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플레처 등 후임 선교사들에 의해 애락원으로 크게 발전하며, 수많은 한센인들에게 재활의 소망을 열어주는 씨앗이 되었다. 아내인 이디스도 동료 마르다 브루언 등과 함께 대구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신명학교를 열어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쉽게도 1912년 남편 존슨의 건강 악화로 부부는 미국에 돌아가고, 이듬해 선교사직을 사임한다. 15년 동안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두 사람이 남긴 흔적들을 청라언덕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관 등으로 사용 중인 옛 챔니스선교사의 사택에 전시된 피아노이다. 

오 목사는 존슨의 또 다른 흔적을 볼 수 있는 청라언덕의 마지막 방문지로 기자를 이끈다. 선교사들의 묘역인 ‘은혜의 정원’ 부근에 조성된 조그만 사과나무 밭이다. 존슨은 미국 미주리에서 40여 종의 과일나무를 들여와 청라언덕에 심었는데, 그 유명한 ‘대구 사과’의 기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선 존슨이 심은 사과나무의 손자격인 ‘3세목’이 자란다.

사과나무가 대구와 경북 곳곳으로 전파되며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양식이 되었듯, 존슨이 전파한 복음과 온몸을 바쳐 행한 의술 또한 무수한 생명을 살리는 샘물이 되었다. 성탄절에 찾아온 사나이 존슨.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그의 인생처럼, 존슨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자라난 이 땅의 교회들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서 살아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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