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집] '사모'의 자리에서 '여성사역자' 새 인생 개척
목회자 남편과 사별 후 사역지 이어받아 치열한 분투
여성사역자에 대한 편견 극복하며 아름다운 영적 결실

‘사모’의 자리는 그 이름에서부터 일단 능동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논리상 ‘목사’라는 대상이 선행되어야만 ‘사모’라는 신분도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 그 위치가 몹시 의존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목사’의 존재가 어떤 이유에서든 세상에서 지워져버린다면, 홀로 남은 ‘사모’의 위상은 대체 무엇이라 해야 할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진 누군가와 그냥 한 묶음으로 처리되는 인생으로 간주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그렇게 목회의 자리에서, 사역의 현장에서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 못한 채 그 쓸모를 완전히 반납해버리는 통상의 과정이 정말 맞기는 한 걸까. “결코 아니다”라는 함성을 온몸으로 내지르는 이들이 있다. 더 이상 ‘사모님’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여성사역자’로서 북풍한설 같은 위기를 뚫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며,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있는 씩씩한 인물들이다.

이들에게 처음 사역의 길을 열어준 광주신학교(학장:이형만 목사)가 지난 가을 그 자랑스런 졸업생들의 일터를 찾아다녔다. 그 길에 동행한 기독신문에서 요새 한참 주가를 올린다는 ‘스우파’ 출연진보다 더 당찬 ‘교회언니’들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주>

흑일도 사랑이넘치는교회 최경숙 전도사

시련에도 꺾이지 않았고 아픔 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홀몸으로도 당당하게 사역하는 그들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여전사들이라 부른다. 왼쪽부터 흑일도 사랑이넘치는교회 최경숙 전도사.
시련에도 꺾이지 않았고 아픔 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홀몸으로도 당당하게 사역하는 그들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여전사들이라 부른다. 왼쪽부터 흑일도 사랑이넘치는교회 최경숙 전도사.

섬에 들어와 살면서도 사실 바다 무서운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저 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인 줄 알았는데, 막상 직접 배를 몰고 다녀보니 시시각각 달라지는 파도의 모습이 엄청난 공포로 느껴졌다. 하지만 최경숙 전도사는 또다시 방주 11호에 오른다. 흑일도 주변의 여러 작은 섬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경기도 광주 출신의 그녀는 강원도 화천 출신의 남편 정광섭 목사와 만나 43년 전 생면부지의 전라도 땅에 발을 디뎠다. 세 자녀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단돈 2만원을 들고 찾아간 흑일도에는 37가구가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볼 때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하다보니, 시나브로 동네 아이들 30명 가량이 다 교회에 나오게 됐고, 장년 성도들도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다.

섬마을을 예수마을로 이루어가는 꿈이 점점 현실화되자, 또 다른 소망이 생겼다. 이웃 섬들에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있지 않은가. 항해술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고, 배를 구해 서투른 솜씨로 순회사역을 시작했다. 큰 파도 앞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여러 차례. 그래도 든든한 남편 목사님이 있어 최 전도사는 행복했다.

하지만 5년 전 어느 주일 오후 먼저 배에 올랐던 남편이 숨진 채로 발견되고, 최 전도사 본인마저 장례 도중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비극을 당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3주 만에 돌아온 그녀는 훨씬 더 단단해져 있었다. ‘최고는 못 되도 최선을 다하는 사역자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남편이 잡았던 배의 조종간을 이제 자신의 손으로 힘껏 쥔다.

광주 예람교회 박영순 전도사

광주 예람교회 박영순 전도사.
광주 예람교회 박영순 전도사.

“오늘 새벽예배는 당신이 맡아 인도하면 좋겠어요.”

처음 일이었다. 기나긴 투병 중에도 정일성 목사는 강단을 비우거나 누구에게 내주는 법이 좀체 없었다. 그런 남편이 자신에게 강단을 맡긴다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박영순 전도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첫 새벽예배 설교를 마치고 내려온 바로 그날, 남편 정 목사는 세상 고통을 뒤로 한 채 천국으로 떠났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목사님이 병중에 계실 때 광주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과정을 끝마치는 것도,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강단을 인계받는 것도, 또 남편 사후 전남노회 목사님들로부터 예람교회 사역을 계속 감당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도 제가 예상한 인생 시간표에는 없던 일이었거든요.”

사별과 동시에 38년 간 사모로서 살아왔던 삶을 마감하고, 교회 담임교역자라는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분투한지 어느새 1년. 박 전도사는 지금도 꿋꿋이 예람교회 강단을 지키는 중이다. 똘똘 뭉쳐 곁을 지켜준 자녀손들 그리고 의리 있는 교우들과 함께,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복음 전하는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해왔다.
특히 코로나19라는 악재 중에서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목요일이면 교회 앞에서 전도지와 방역마스크를 함께 나누어주며 노방전도를 계속 해온 일은 스스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오늘도 박 전도사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는 예람교회의 설립당시 표어를 계속 푯대 삼아 달려간다. 그 길 끝에서 다시 만나 “고생했소, 여보”라며 어깨 토닥여줄 남편의 손길도 기대하며.

완도 한빛교회 박금숙 전도사

완도한빛교회 박금숙 전도사.
완도한빛교회 박금숙 전도사.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 목회라고 배웠으니까요. 그렇게 사랑하고, 섬겨야지요.”

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이다. 이토록 또렷한 목회관은 그녀의 발길이 닿는 마을회관이나 노인정에서, 그녀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고스란히 실천되고 있다. 한빛교회 박금숙 전도사는 5년 전 사별한 남편 이상현 목사로부터 참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이상현 목사는 낙도선교회 파송을 받아 1995년 완도 망석리로 찾아왔다. 화려하고 소문난 목회를 꿈꾸는 대신 단순히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한 영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그는 일관되게 살았다.

분당중앙교회 후원으로 선교선 등대 1호를 기증 받은 후에는 완도 일대 35개 낙도들을 손수 순회하면서, 외로운 이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사람들은 그의 수고에 위로와 기쁨을 얻었지만, 대신 고단함을 치른 심신은 점점 쇠약해졌다. 마침내 2016년 어느 주일 새벽에 항상 숨이 차도록 바쁘기만 했던 그의 호흡이 갑자기 멈추었다.

‘완도의 모든 섬들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를’ 꿈꾸었던 고인의 소망은 어느새 아내의 비전이 되어있었다. 한빛교회를 이어 맡으면서 광주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박 전도사는 존경스러운 인격들을 여럿 만났지만, 그래도 가장 큰 스승은 역시 남편이었다. 20년 넘는 낙도사역자의 생애 기간 그 순전한 신앙으로 가족들부터 감화시킨 고인의 영향력은 여전히 생생하다.

“저 뿐만 아니라 두 딸까지 총신에 진학하여,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쓰임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이들, 외로운 이들을 향해 우리 삶이 다하도록 사랑을 바칠 것입니다.”

흑산도 수리교회 김정자 전도사

흑산도 수리교회 김정자 전도사.
흑산도 수리교회 김정자 전도사.

“전도사님은 쇳덩어리처럼 강하시고 독해요.”

누군가 웃으며 이렇게 말을 건넬 때마다 김정자 전도사는 한 사람을 떠올

린다. 10년 전 고인이 된 남편 정상섭 목사도 ‘노가다 목사’라 불렸다. 그 별명이 잘 어울릴 만큼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엄청난 일꾼이라는 평판을 받았는데, 이젠 자신이 그 캐릭터를 차지한 것이다.

수리교회 부임 후 정 목사는 이 섬에 뼈를 묻겠다고 공언했다. 약속대로 그는 호적까지 흑산도로 옮겨 놓고, 마을의 일원이 되어 우물을 파고 섬 아이들을 도맡아 키우는 등 24시간 일만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 섬에서 생을 마치고 그 유해가 섬에 모셔졌다.

남편의 유언과 수리교회 교우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교회사역을 이어받아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김정자 전도사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감당해야 할 책임이 너무 무거워 도망치고 싶었고, 하나님께도 매일처럼 ‘저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아뢰며 놓아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어느 날 눈에 들어온 룻기의 말씀이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그래, 우리 교우들을 어머니처럼 정성껏 모시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평안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남편을 그리워하며 3년간 쏟았던 눈물은 더 이상 흘리지 않는다. 하나님 심부름을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성실하게 살았고, 교우들과 이웃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에서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정 목사의 생전 모습들을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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