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지난해 산정현교회는 ‘연탄은행’에 연탄 1만장을 보냈다. 특별한 요청은 없었으나 코로나19로 매우 어렵다는 뉴스를 보면서 그렇게 했다. 올 겨울을 앞두고는 2만5000장을 다시 보냈다. 더 어려워진 것 같아서다.

한 장에 800원짜리 연탄. 값싼 연탄을 연료로 겨울을 나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연탄’하면 대학 다닐 때 후배의 연탄가스 사고사가 떠오른다. 그게 언제인가? 그런데 아직도 연탄으로 난방을 하다니? 더욱이 그 연탄마저 없어 추위에 떠는 이웃이 있는 이 세상은 과연 건강한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연탄! 참 정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직도 연탄불에 고등어와 삼치를 구워 파는 식당골목이 있다. 값싼 연료인 연탄. 그것의 원료를 캐내는 곳을 ‘막장’이라고 하던가.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노동의 대가로 활활 타는 그 불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니 아이러니다. 연탄의 가치! 값이 싸서 아직도 가난한 이들의 몸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것에서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는 내용의 시가 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작품이 그렇게 시작된다. 이어지는 시구는 이렇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반쯤 깨진 연탄 / 언젠가는 나도 /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묻는다. 연탄 값을 지불해주는 착한 일을 한다지만, 연탄처럼 타고 싶지는 않은 ‘나’다. 연탄처럼 탈대로 다 타고 하얀 재를 내주는 것이 사랑이거늘. 주님께서 그렇게 다 태워 재가 되도록 나를 사랑하셨는데, 이 겨울에 나도 탈대로 다 타는 사랑이고 싶다.

연탄을 직접 보기 힘든 세상을 살고, 스위치만 켜면 언제든지 더운 물이 콸콸, 실내는 화끈한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그 스위치 켜는 손가락만 움직일 뿐 온몸을 태워 사랑하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그립다. 연탄! 어깨 으쓱거리며 ‘연탄값’만 들이미는 모습이 아닌 소박한 연탄, 그것이고 싶다. 점점 싸늘해지는 아침기운에 겨울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연탄이어야 할 텐데. 비싼 존재로 평가받지는 못해도, 뜨거운 열기를 품은 연탄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진한 향을 느끼고 그 즐거움도 ‘찐’하게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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