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마다 당당한 신앙양심의 길 걸어가다
일제강점기 대대적 탄압에도 교회 지켜 … 1953년 작성 당회록에 영욕의 세월 담아

온갖 시련 중에도 당당한 신앙의 결기를 보여주며 설립 120주년을 맞이한 경산 진량제일교회의 예배당 전경.
온갖 시련 중에도 당당한 신앙의 결기를 보여주며 설립 120주년을 맞이한 경산 진량제일교회의 예배당 전경.

유치장에 갇힌 지 3개월이 지났다. 그 때까지 아무도 갇힌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간수의 명령에 따라 기상하고, 끼니를 때우고, 취침하는 나날이 반복될 뿐이었다. 답답했다. 바깥세상이 보고 싶었고, 가족들이 그리웠다.

1943년 6월 20일 안치대 집사는 아내와 논에서 보리를 베고 있다가, 진량지서 순사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왔다. 붙잡힌 사람은 안 집사만이 아니었다. 봉회교회(현 진량제일교회)를 함께 섬기던 강만조 전도사를 비롯해 김종철 안치준 손우헌 등 주요 지도자들은 다 끌려왔다. 심지어 강만조 전도사가 순회하며 사역하던 상림교회와 평사교회 제직들도 같은 처지가 됐다.

교회 설립 100주년 당시 개최한 기념음악회.
교회 설립 100주년 당시 개최한 기념음악회.

그해 10월이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본격적인 고문이 시작됐다. 고춧가루를 물에 타서 코에 들이붓는가 하면, 가죽 채찍으로 때리기도 하고, 감방열쇠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리는 날도 있었다. 그 때서야 일행은 자신들이 체포된 이유를 알게 됐다.

강만조 전도사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일제의 눈총을 받던 상태였다. 당시 일제 앞잡이가 되어 호시탐탐 그에 대해 트집 잡을 기회를 노리던 조선인 순사 임융교가 피택장로 김종철의 집을 뒤지다가, 성경 속에서 강 전도사의 설교요점을 정리한 노트를 발견했다.

초창기 진량제일교회 역사가 서술된 1953년의 당회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자료이다.
초창기 진량제일교회 역사가 서술된 1953년의 당회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자료이다.

‘민족주의자 모세를 본받자’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설교내용을 빌미로 결국 임융교와 일본경찰들이 강 전도사는 물론이고 그가 섬기던 교회들 전체에 반역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교회 강대상 안쪽에 ‘일본타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글자를 몰래 새겨놓는 등 증거들을 조작해 교회를 궁지로 몰아갔다.

체포된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그로 인해 오랜 기간 억울한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뿐만 아니었다.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거나 소실되었고, 예배는 중단되었다. ‘노아 할아버지’라 불리던 신원미상의 성도 한 사람만 무성한 잡초를 뽑으며 교회당을 지켰다.

진량제일교회의 예배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재개되었다. 하지만 옥중에서 당한 고문으로 깊은 병을 얻은 강만조 전도사는 얼마 못가 교회를 사임해야했다. 남은 교우들도 6·25라는 고난을 한 차례 더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신앙생활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고난의 주역들에게 훗날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한다.

공단 근로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1978년 구입한 복음버스.
공단 근로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1978년 구입한 복음버스.

진량제일교회의 출발은 1901년으로 거슬러간다. 대구경북 일대에서 활동하던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해들은 이들 중 경산군 진량면 봉회동에서 살던 김주환 씨가 김영우 조병권 김윤미 씨 등과 함께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예배하며 가정교회로 시작했고, 1904년에는 같은 마을 조성수씨의 집을 매입하며 정식 교회로 설립된 것이다.

현재는 대구시내로 편입된 사월교회에 이어 경산지역 및 경청노회 소속교회들 중 두 번째로 긴 역사를 가진 신앙공동체라는 자부심도 크지만, 진량제일교회가 더욱 자부심을 갖는 것은 앞서 서술한 일제강점기의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신앙선배들의 단단한 결기이다.

신상리에 방주 모양 예배당을 건축하던 시절의 모습.
신상리에 방주 모양 예배당을 건축하던 시절의 모습.

그 결기는 교회가 위기상황에 처할 때마다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쉬운 길, 편한 길을 따르기보다 고통과 수모를 각오하면서까지 신앙 양심상 옳다고 믿은 바에 따라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발자취들이 이를 증명한다.

비록 엄청난 수난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당회록 등 초창기의 기록들은 죄다 소실되고 말았지만, 다시 재건된 교회에서 1953년 작성한 제1회 당회록의 서문에 영욕의 세월들에 대한 약사가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를 기초로 진량제일교회는 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김래규 장로)를 구성해 올 봄 <진량제일교회 120년사>를 발간한 데 이어, 경청노회를 통해서는 제106회 총회에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신청했다. 제22대 담임목사로 사역 중인 김종언 목사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새 역사를 펼쳐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받은 은혜 나누는 공동체 되겠다”

진량제일교회 김종언 목사

120년 동안 받은 은혜를 세상과 나누는 데 힘쓰는 공동체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진량제일교회 김종언 목사(사진 오른쪽)와 이말식 장로.
120년 동안 받은 은혜를 세상과 나누는 데 힘쓰는 공동체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진량제일교회 김종언 목사(사진 오른쪽)와 이말식 장로.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우리 교회가 지닌 가장 큰 힘이라 할 수 있지요.”

15년째 진량제일교회를 담임하는 김종언 목사의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간다. 현재 경산시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신앙공동체이면서, 새로운 환경에는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실제로 교회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토박이 성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인근 공단 조성 후 신규로 유입된 교인들과도 서로 수용하고 적응하는 일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화합한 힘으로 더 큰 시너지효과를 일으키고 있으니까요.”

성탄절이 돌아오면 지역 아동들에게 푸짐한 선물키트를 마련해 공급하는 등 교회 절기를 비롯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낌없이 베푸는 사역으로 지역사회의 환영을 받고 있고, 교회 리더들도 이웃들에게 덕망을 드러내며 신앙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분위기라고 김 목사는 첨언한다.

“과거 선교사로부터 전래받은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도 열심히 전파하고, 도명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인재들을 키웠던 선배들의 전통을 오늘날 다문화선교사역과 다음세대 사역으로 계승하는 중입니다.”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선교 사역에 참여하며 인도에 기념교회를 세우기도 했던 진량제일교회는 2015년부터 인근 공단을 중심으로 다문화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2020년에는 박영호 목사와 성도 20여 가정을 파송해, 더네이션스교회라는 이름의 다문화공동체를 분립개척하기도 했다.

다음세대사역은 한층 더 눈부시다.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주일 1부 예배를 자녀와 부모가 함께 하는 세대통합예배로 실시하면서, 총회에서 제작한 <하나 바이블>을 활용해 설교 공과공부 구역예배까지 유기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시스템 도입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120년 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더 넓은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일에 열심을 내보려 합니다.”

교회 종탑에 깃든 헌신의 기억들

1970년대는 진량제일교회(당시 봉회교회) 안팎의 모든 상황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1971년 무렵 당회원들 사이 불화가 긴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소속 교단과 노회를 옮기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와중에 설립 이후 줄기차게 지켜온 봉회리 터전을 떠나 이웃 신상리로 옮겨가는 예배당 신축공사까지 추진됐다. 낡고 협소한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착수해야 할 일이었으나, 시기가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공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온 교우들이 전심을 다해 건축에 협력했다. 작정한 헌금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도 기필코 바쳤고, 부족한 시간과 힘을 짜내어 건축현장에서 일을 거들었다. 예배당이 들어설 산비탈을 삽과 괭이로 일구며 기초를 다진 것도, 마을로부터 공사장까지 엄청나게 긴 물길을 만들어낸 것도 교우들의 힘이었다. 권사들은 매일 같이 금식기도회를 열며 응원을 보냈다.

1973년 8월 마침내 노아의 방주 형상을 닮은 새 예배당이 완공됐다. 이후로도 교우들의 헌신은 계속 이어져 1979년 11월 헌당식이 열렸으며,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그 이듬해 진량제일교회는 다시 총회와 경청노회로 복귀했다. 2009년 다시 봉회리로 돌아가, 현재의 예배당에 입당하기까지 방주 모양의 예배당은 소중한 둥지 역할을 했다.

교회 120년사에는 신상리 예배당 공사를 마치고 그 다음 해인 1974년 6월 종탑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대구서문시장까지 약 32km되는 거리를 무거운 종집까지 실은 채 손수 리어카로 왕복했던 한 교우는 ‘새벽에 떠난 길을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기진맥진한 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추억의 예배당, 그리고 그 시절 믿음의 선배들이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았던 헌신의 기억은 여전히 진량제일교회 입구를 굳건히 지키는 종탑 속에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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