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죽산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WCC에 대한 소고
[특별기고] 죽산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WCC에 대한 소고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전 총회역사위원장)
  • 기독신문
  • 승인 2020.12.08 13: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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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신학 이정표 제시하며 참된 목사로 삶을 바치다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전 총회역사위원장)
함성익 목사(창성교회, 전 총회역사위원장)

필자는 서울 창성교회에서 30여 년간 지역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힘쓰고 있는 목사이다. 필자의 선친 함영진 목사는 삼양교회에서 35년을 사역하시고, 은퇴 후에는 일본 선교사로서 한평생을 바치셨다. 필자의 선친과 필자가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학의 혼돈기와 교단의 분열 속에서도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에 근간을 지키셨던 신학의 명장(名將)인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신학의 뼈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를 모체로 삼고, 1948년 6월 3일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총회신학교)의 초대교장을 역임하셨다. 총신의 교장과 초대학장으로 다년간 재직하신 한국 장로교를 대표하는 신학자다.

총신대의 정원에는 신자(信者)가 되라, 학자(學者)가 되라, 성자(聖者)가 되라, 전도자(前導者)가 되라, 목자(牧者)가 되라는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총신의 건학이념이 된 5가지 교훈은 박형룡 박사가 제시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에 개혁신학적 기반을 조성한 지로적(指路的)인 역할을 하며 많은 신학자들을 양성한 교육자요, 목회자이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두고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통합 측이 옹호하던 WCC의 밑바탕에는 자유주의를 비롯한 비신학적 입장이 흐르고 있었고, 결국 합동과 통합의 간극을 좁힐 수 없는 신학적 갈등이 분열로 이어졌다. 필자는 역대 최대라 볼 수 있는 마찰의 중심에는 정통보수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이었다는 점에 무게를 둔다. 따라서 박형룡 박사가 해당 사건에서 교단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냉철한 비판력과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神學)

박형룡 박사는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했다. 성경의 영감과 성경의 무오로 대변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신학노선을 취한 학교에서 근본주의의 대변자로 자유주의에 맞선 메이천 교수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은 한국교회나 박형룡 박사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큰 섭리였다.

유학을 마치고 박형룡 박사가 국내에 들어와 신학의 선봉장이 되었던 1930년대, 한국 장로교 안에는 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보수와 진보,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과 무교회주의와 신비주의의 무분별한 사조들이 범람하면서 한국교회는 신학적 정체성의 혼선을 겪고 있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미 자신의 스승 메이첸이 미국 내에서 자유주의와 거세게 투쟁하던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장악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도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보다 더 나쁜 것으로 규정했다.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자요, 한국의 표준 신학자인 박형룡 박사는 정통이 아닌 모든 것을 자유주의로 이해하고 철저히 성경무오설에 입각한 비타협적인 보수 신앙을 고수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종교조직으로 단정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基督敎近代神學難題選評)을 저술하여 혼탁한 신학사조에 대한 정통 보수신학의 지로를 제시해 주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4회 총회 때 <단권성경주석>에 대해 황해노회장은 헌의를 통해서 강력하게 장로회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을 가했다. 이때, 해당 주석서가 드러냈던 성경무오설에 대한 비신학적 색채를 박형룡 박사와 길선주 목사가 논리정연하게 비판했다. 그 사건을 경계삼아 총회 차원에서 표준주석을 발간하여 정통신학 노선을 견지하여 발빠르게 대처했다. 이와 같이 정통신학의 선두주자로 서 있다 보니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수학하고 온 다수의 학자들과 연이은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박형룡 박사와 WCC

1958년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을 통해 “이 운동은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의 지도 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박형룡 박사가 WCC를 바라보는 입장은 한 마디로 ‘WCC는 방만한 자유주의’라는 점이다.

필자는 여기서 1959년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뼈아픈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제44회 총회의 분열의 단초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숙한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당시의 교회 성도들을 진리로 안내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불법이 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교회를 흔드는 일에 총회라는 이름을 무법하게 이용했다.

또한 1883년 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傳)을 통해 세계 교회 앞에 유례없는 자국인에 의한 교회설립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이 땅의 장로교이다. WCC에 대한 미숙한 동경심으로 섣부른 수용에만 몰두한 나머지 연합을 외치면서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고, 해외 교단들과 선교사들의 눈치를 보며 자립, 자치, 자전의 정신을 너무 쉽게 내버리는 굴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가장 뼈아픈 모습은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교회의 교사요,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서 존중했던 한 은사를 교권과 패권을 이용하여 장로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매도함으로써, 정통신학의 일탈과 한국교회에 혼돈을 야기한 자신들의 일탈행위를 감추려고 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묵자는 ‘비지가부불이중과 설재가비(誹之可否不以衆寡, 說在可非)’라 하였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옳고 그름의 노선이 뒤바뀌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형룡박사 저작전집>에서 ‘정통’이라는 말은 ‘옳은 의견’이라는 말이다. 다수인, 혹은 주권자에게 채용, 혹은 우세를 얻었거나 말았거나 ‘옳은 의견’이면 정통신앙이다. 참으로 ‘옳은 의견’이란 여럿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 뿐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정통은 오직 하나인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 역사 자료에 의하면 ‘1959년 9월 28일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문제점으로 인한 한국장로교단의 분열은 제3의 가장 큰 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분열을 조장했던 기저에는 분명히 자유주의 신학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국 장로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성경적으로 지도하던 역할을 한 인물을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분별력을 잃고, 불법총회를 열어서라도 자신들의 노선을 구축하려고 한 무법한 사건의 가림막이 정도로 거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열의 핵심을 두고 박형룡 박사를 운운하는 것은 당시 청교도적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을 따르려고 하였던 모든 목사들의 지조를 짓밟는 행위이다.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은 제44회 총회가 아닌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사표수리로 인하여 일단락 된 사건이다. 박형룡 박사는 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동참함으로서 자유주의적으로 기울 수 있음을 경계시키기 위하여 정통신학의 노선을 지켜려 한 기수의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다.

은사 박형룡 박사를 기억하며

한국의 보수신학의 핵심 주자로 단연코 박형룡 박사를 들 수 있다. 구프린스톤의 근본주의적 보수신앙을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통해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제시했고, 화란의 칼빈 신학자로 알려진 아브라함 카이퍼를 이은 바빙크, 벌코프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노선을 한국장로교 안에 소개한 그의 공적은 정통 그 자체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장로교 앞에 신학의 지로적 역할을 했던 것을 ‘꽃밭에서 꺾어온 꽃다발’격으로 묘사했다. 교회의 교사가 되어 성경의 가치를 더하지도 감하지도 아니하며, 한국교회에 소개하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은 교회 대중의 바른 신앙을 확립하기 위한 전투사적인 자세로 나타났다.

바른 신학과 바른 신학교육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로 여기며 교권과 결탁한 자유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종교라고 여기며 획별차천명(劃別且闡明)한 그의 사명의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도 개혁신앙을 말할 수 있고, 정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바른 신학의 방향을 한국교회에 제시한 박형룡 박사를 이렇게 기억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자의 자세로, 치열하게 격돌한 신학사조의 갈등 속에서 학자의 양심을 지키고, 성자의 품위를 지키며, 한국 장로교회 앞에 올바른 신학의 이정표를 제시해 준 전도자요,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안내한 참된 목자로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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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 2020-12-19 00:11:13
남산 신학교 개교일이 1948년 6월 3일이 맞나요?

김기영 2020-12-14 19:10:24
죽산이 작금의 합동 교단을 보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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