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운동 힘 불어넣다
국제 신학계에 칼빈 등장 도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 한국의 칼빈 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대다수 기독교인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였던 부써는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된 독일 아우구스티누스회 엄수파 수도회 총회에 참석해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듣고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후 부써는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제1세대 개혁자들 중에서도 부써는 특히 개혁주의 전통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써는 칼빈과 버미글리와 같은 소위 ‘개혁주의 전통의 편찬자들’을 이끌어준 선배의 역할을 감당했다.

1538년 성찬과 권징 문제로 제네바교회에서 추방당한 칼빈을 스트라스부르로 초청해 목회 사역과 신학 교육의 길로 인도했으며, 또한 국제적인 신학계에 칼빈을 등장시킨 인물이 바로 부써였다. 또한 종교재판소를 피해 참된 신앙을 찾아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버미글리가 개혁주의 신학자로 등장한 곳도 역시 부써의 스트라스부르였다. 칼빈과 버미글리는 부써의 집에서 일정기간 지냈고, 부써의 학식과 경건은 이 두 신학자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칼빈이 초기에는 불가시적 교회만을 강조했는데, 3년간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면서 부써에게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을 새롭게 배우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만큼 부써는 칼빈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부써는 1540년 전후로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개혁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1540년 전후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교회연합운동이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모든 비난의 화살을 홀로 맞으며 견뎌야 했다. 또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연합군이 황제군에게 패배해 황제가 잠정안을 받아들이도록 스트라스부르에 강요했을 때, 그는 수용을 반대해 도시에서 추방됐다.

역사 속에 묻혀있던 그의 이름은 20세기 초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초기 개혁자로서 험난하고 열정적으로 교회연합운동에 앞장섰던 부써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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