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

해질녘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믿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얽매는 온갖 굴레로부터 자유를 주시는 주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라고 한다. 즐거운 기다림도 있지만 어떤 기다림은 괴로움이 되기도 된다.

믿음의 특징은 바로 기다림이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초대교회 성도들이 외치던 ‘마라나타’는 바로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장 32~33절을 보면 해질 때를 기다리다 주님께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데려온 사람들의 모습에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들은 종교법에 얽매여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유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족쇄와 같았다.

두 번째는 그들의 기다림이 정말 간절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적 전통과 문화적 굴레는 해질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혹시 나도 율법적 요구로 스스로 삶을 얽어매는 것은 아닌가? 그로 인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작은 병이라도 당사자에게는 큰 고통이다. 예수님께 가면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은 그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안식일이라는 율법적 멍에로 인해 환자들은 해질녘까지 기다려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멍에를 메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율법의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며, 그들의 위선과 오류를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안식일의 율법적 요구보다도 더 중하게 보시고, 자신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무거운 짐과 고통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면 치유와 쉼을 주시는 예수께로 나아가면 된다(마 11:28). 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예수께로 가서 나의 무거운 짐을 맡기자. 안식일이 끝날 때를 기다리는 것은 고통의 시간을 연장할 뿐이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병든 자들을 기다리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셨다. 그분은 율법의 얽매임에서 자유로운, 풍성한 삶을 더 중요시하고 계심을 마가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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