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2007년은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전국 교회가 ‘Again 1907’의 기대와 소망으로 들썩이는 가운데, 1월 26일부터 27일까지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24개 주요 교단장들의 콘퍼런스가 열리며 그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제주선교의 시작이 평양대부흥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에 다른 지역에서보다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해 7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리며 분위기가 최고조에 올랐을 시점에, 한국교회 특히 제주의 교회들을 비탄에 빠뜨리는 뜻밖의 소식이 머나먼 중동 땅에서 전해졌다.

선교와 봉사활동 차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던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이 7월 19일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염원에도 불구하고 23명의 일행 중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 두 사람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제주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의 생전 모습
제주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의 생전 모습

배형규 목사는 제주영락교회 출신이다. 6·25 당시 피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이 교회에서 배형규 목사는 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 배호중 장로는 부부가 함께 교회 농아부 교사로 섬기며 약자들을 보듬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 영향으로 배형규 목사도 백혈병 환자를 위해 골수기증을 서약하는 등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는 인물로 성장했다.

한양대 경영학과와 서강대 대학원을 거쳐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후 목사가 되어서도 그 성품은 여전했다. 서울영동교회와 분당샘물교회에서 청년사역을 맡는 한편으로 해외선교와 탈북자사역에도 헌신하며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을 돕는 삶을 살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낙도선교회 대표 박원희 목사가 쓴 <내 친구 배형규>에는 이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아프간에서 피랍된 이후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다른 이들의 안위를 먼저 챙겼다는 ‘파란 담요’ 이야기나, 최악의 순간에 자신이 먼저 목숨을 버릴 각오를 밝혔다는 당시 생존자 증언을 듣노라면 과연 순교자 반열에 오르기 합당하다 할 그의 신앙과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예장통합 교단은 2010년 제95회 총회에서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했고, 그의 존영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한 자리를 차지하여 순례자들을 만나고 있다. 제주도에도 2012년 9월 이기풍선교기념관에 배형규 목사 순교기념비가 건립된 데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고인의 모교회인 제주영락교회 60주년을 기념해 배 목사를 기리는 또 다른 순교기념비가 세워졌다.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며, 이도종 목사의 뒤를 잇는 제주 출신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몹시 가슴 아프고도 뜻깊은 사건이었다. 제주의 교회들은 배 목사가 흘린 순교의 피가 반드시 복음과 하나님나라 확장에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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