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건 목사의 제주교회이야기]

제주선교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기풍 윤식명 김창국 등 목사였던 것은 맞지만, 배후에서 여성 사역자들이 감당했던 역할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남녀의 구분이 엄연했던 시대, 여성들을 믿음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서와 문화에 공감하면서 길잡이가 되어 줄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전도부인들은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교회에 여성사역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데는 이 땅에 온 최초의 여성선교사이자 미국북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의 여성주일학교가 효시 역할을 했다. 여성주일학교는 이름도 없이 남성들의 부속품처럼 존재하던 여성들에게 차별 없이 자녀와 일꾼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했다. 그리고 그들 중 뛰어난 인물들에게는 ‘전도부인’이라는 직함을 안겨, 복음사역자로 헌신하도록 했다.

제주 성내교회에 있는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공적비.
제주 성내교회에 있는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 공적비.

전도부인들은 주로 권서인(매서인)의 역할을 했다. 성경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와 사역자들을 조력하는 임무들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특히 민간에서 무속이 강력한 영향을 발휘했던 시절, 전도부인들은 그 풍습을 깨는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서 큰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선광은 그 전도부인 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독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제1호 선교사로 파송한 후, 그를 도울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1908년 당시 독노회 전도국장이던 길선주 목사는 이기풍 목사의 요청에 따라 여전도인 파송을 청원했고, 그 결과 전도부인 이선광이 두 번째 선교사로 임명받아 제주도에 파송된다. 이선광의 후원은 평양여전도회가 담당했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달리 여자들의 가정 안팎에서 역할 비중이 크고, 권한 또한 적지 않았다. 제주의 여성들에는 그래서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모습들이 존재했다. 혈혈단신 먼 길을 찾아온 이선광의 모습은 제주 ‘아지망’들에게 적잖은 동질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미신적인 풍습들이 넘쳐나는 섬 특유의 문화 속에서, 이와 대결하는 데 익숙했던 전도부인으로서 경험은 이선광이 제주 선교사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제격이었다.

과연 기대대로 이선광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듬해 제3회 조선독노회에는 이선광의 공로로 ‘저간에 부인네 중에 열심히 주를 믿는 자매들이 생겼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이에 감동한 현장에서 방기창 이치수의 인도로 함께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선광은 성내교회를 비롯해 주로 제주 산북지방의 교회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담당했다. 그녀의 헌신은 지속적이었고, 열매 또한 꾸준했다. 제주 교회들을 담당하는 목사들이 여러 사정상 자주 바뀌는 와중에서도 이선광은 1908년부터 1925년까지 무려 17년간 제주에 머물며 신앙의 어머니로서 족적을 남겼다.

평양여전도회의 5년 후원 약정이 끝난 후에는 전라노회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나중에 이선광의 임기가 끝나 제주를 떠날 상황이 되자 아예 제주 성내교회가 그녀를 두 차례나 여전도인으로 임명하여 계속 동역하기도 했다. 제주는 계속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육지로 돌아간 그녀는 황해도 장연에서 생을 마친다. 그녀가 못다 한 복음사역은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다. 아들 이승길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5대 총회장을 지냈으며, 손자 이준경 장로와 증손자 이건영 목사는 인천제2교회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공동체로 성장시켰다.

성내교회에는 이선광의 공로를 기리는 기념비를 교회 앞마당에 세워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전쟁 등 격동기에 분실되고 말았다. 한 때 총회 차원에서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여선교사인 이선광의 기념관을 건립하는 계획이 추진됐지만 현재까지 진척이 없는 상태이다. 필자가 섬기는 동홍교회에서는 교회당 안에 이선광 역사실을 설치하기 위해, 현재 공간을 마련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