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알게 모르게 교회의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회계연도가 끝나는 연말이 되면 부서마다 회식이 줄을 잇는다. 그동안 회식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해 예산을 남김없이 다 쓰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교회 재정은 그렇게 써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 안 먹고 모아 드린 헌금을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된다.

교회 재정을 아끼는 데는 무엇보다 담임목사의 태도가 중요하다.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담임목사 자신이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른다면 가난한 마음으로, 믿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른다면 가난한 마음으로, 믿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돈을 밝히지 않는 목사님”이라고 자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손사래를 친다. 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나름 나도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 살고 있다. 성인들처럼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자처하는 것도, 가난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실천하고픈 아주 평범한 보통의 목사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기도제목은 있다. 가난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가난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든 마음이 있다. 하나는 교만한 마음이요, 또 하나는 비굴한 마음이다. 사람은 조금 잘된 듯싶으면 교만해지고, 조금 잘못된 듯싶으면 비굴해지기 쉽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한다. 인기가 많아지거나 돈과 권력이 생기면 인격도 높아진 줄 알고 교만해지기 쉽다. 반대로 인기가 떨어지고 돈도 권력도 떠나가면 인격도 함께 손상된 줄 착각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깨끗하고 고상하고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모른다. 목회자의 길은 더욱 그렇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을 여덟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성품으로 ‘마음의 가난’을 꼽으셨다. ‘가난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인격과 모습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이다. 가난한 마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다.

오늘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교회도 많고, 성직자도 많고, 교인도 많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마음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마음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가 최대의 위기상황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교인의 수나 건물이나 대형집회가 모두 모래 위에 지어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내용 없는 겉치레에 불과하기 쉽다. 가난한 마음이 결핍된 어떤 부흥도 성장도 모임도 결국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가난하고 겸손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기독교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을 가졌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은과 금과 제도와 사람과 방법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은 상실하고 있다.

우리는 솔직히 자신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고백해야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우리는 다시 우리의 역사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난한 마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모두 다시 초심으로, 처음으로 돌아가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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