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19세기 위대한 설교가였던 무디는 가슴이 답답하고 삶의 무력감을 느낄 때 직접 노방전도를 했다고 한다. 한꺼번에 수천 명을 감화시켰던 그였지만, 한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고 부딪치면서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목회활동 외에 대외적인 활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어 일주일동안 목양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하루 종일 목양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교회 일을 살피다보니 종종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지곤 했다.

매년 1억원 넘게 이웃을 구제하고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구제를 시스템에 맡겨둔 채 정작 나 자신은 가난한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상책이다.

재물에 인생의 발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사랑으로 섬기도록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재물에 인생의 발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사랑으로 섬기도록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민센터를 찾아가 몸이 불편하고 도움이 필요한 차상위계층 20가구의 주소를 받았다. 그럴 때 하나 더 요청하는 것이 있는데, 될 수 있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불신자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이들은 그나마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은 그마저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한 달에 한 번씩 교인들과 함께 불신 장애인들에게 생필품 5만원 어치를 가져다주는 ‘5만원의 사랑나누기’이다.

5만원으로 구입하는 생필품의 종류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칫솔, 치약, 세제, 휴지 등 욕실용품으로부터 제철과일과 생선, 명절이 있는 달에는 고기도 빼놓지 않는다. 매달 어떤 물건을 구입했는지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이때쯤 이것이 떨어졌겠다 짐작하고 이에 맞게 물건을 구입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영자(가명) 할머니는 금남시장 뒤편 반지하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다. 금남시장은 옥수중앙교회가 있는 언덕배기와 함께 옥수동과 금호동에서 재개발을 피해간 몇 남지 않는 곳 중 하나다. 처음에 윤 할머니 집을 찾아갈 때는 한참을 헤맸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골목이 나왔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이 나왔다.

“이렇게 못난 사람을 찾아주니 감사해요.” 윤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25년을 꼬박 누워 살았다. 병원에서 다리 치료를 받다 실수로 목 신경을 다쳐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 누워서 식사를 하고 용변도 처리해야 했다. 남편은 누워있는 할머니를 남겨두고 오래 전 집을 나갔고, 할머니의 간호는 자연스레 피붙이 딸의 몫이 됐다.

40대 중반의 딸은 선천적으로 왜소증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딸과 그 위로 아들 둘이 있는데, 역시 왜소증으로 이렇다할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불쌍하지만 딸도 못지않게 가여웠다. 딸은 수십 년을 작은 반지하방에서 거동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두 오빠를 먹이고 챙기며 살았다.

“할머니가 빨리 나으셔야 따님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할 거 아니에요.” 내가 할머니에게 농담을 하면 옆에 선 딸은 수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우리 딸이 착해요. 내가 울면 ‘왜 울어! 엄마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많아!’ 그래요.” 윤 할머니는 누워서도 딸 자랑이었다. “한강물이 다 내 눈물”이라고 말할 만큼 눈물이 메마를 날이 없었지만, 딸이 있어 할머니는 눈물 속에서도 꾸역꾸역 견뎌올 수 있었다.

가져온 물건을 전하고 안부를 묻고 마지막에는 손을 잡고 기도한다. 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25년을 누워 지낸 할머니며, 그런 엄마를 돌보는 딸이며 낮에도, 어두컴컴한 반지하방이며 모든 것들이 아픔이고 눈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자는 돈이 많아 연락을 즐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나사로는 거지로서 땅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양자의 운명이 전혀 반대의 자리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부라는 그 자체가 단순히 불경건과 죄악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부가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채울 뿐 이웃의 궁핍과 아픔, 곤고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 부는 바로 그 소유자와 함께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부란 혼자 소유하고 즐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재물에 자기 인생의 발판을 두려는 모든 시도를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재물이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도록, 곧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의무임을 깨달아야 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