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셔틀러(Philip D. Shutler 미해병대 예비역 중장)

필립 셔틀러(Philip D. Shutler) (미해병대 예비역 중장)
필립 셔틀러(Philip D. Shutler) (미해병대 예비역 중장)

나는 미해병대 1사단 수색 소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8월 첫 전투에 참여하고 이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우리는 서울을 탈환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서울로 진격할 당시 한강의 다리는 폭파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수륙양용장갑차를 이용해 한강을 넘어 다녔다. 장갑차 운전병이 길을 잃어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적군과 마주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어느 날은 우리 부대가 적군의 한 가운데서 북한 탱크에 포위되어 싸울 병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탱크에 포위된 상황에서 전투기 공격까지 받았다. 전우들은 전투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렇게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우리 부대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개마고원의 장진호를 향해 북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우리는 장진호전투와 함흥부두철수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철수한 부대였다.

장진호전투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소대 앞으로 지나가던 피난민들은 너무나 누추하여 연민의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장진호전투에서 많은 장병들이 희생됐다. ‘Chilly Gun’이라고 부를 정도로 영하 35도의 혹한의 날씨 속에서 싸웠다. 그 혹한과 수많은 중공군을 물리치며 우리는 후퇴했다.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에 승선할 때까지, 우리는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장진호전투와 흥남부두철수작전을 수행한 지 69년이 지난 2019년, 새에덴교회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새에덴교회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5박 6일간의 행사를 마련하고 우리를 초대했다. 그 동안 많은 행사에 참여했지만 새에덴교회의 초청행사는 정말 놀라웠다. 교인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은 활기와 생기가 넘쳤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의 헌신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었다.

이번 초청으로 나는 5번째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1950년 전쟁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고, 1978년 두 번째로 내한했다. 당시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초가집 대신 벽돌집들이 주택가를 이뤘고, 도로들도 넓어져 있었다. 한국은 굶주림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해져 있었다. 그 후 다시 2005년 방한했을 때, 장갑차로 넘어다니던 한강에 20여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93세의 나이로 이번에 한국을 찾았을 때, 한강에 31개의 다리가 놓여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모두 몸에 전쟁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실종자와 전사자 가족들은 오랫동안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지 의구심과 슬픔 속에서 살아왔다. 새에덴교회 초청행사를 통해 나는 그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자유 대한민국의 눈부신 번영과 밝고 행복한 한국의 봉사자들을 보며, 우리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현충원, 미8군, 판문점, 해병대 등을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멋진 팡파르와 감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너무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비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 is Not Free)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웠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숭고한 희생이 자유민주주의를 세운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뉜 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50년 겨울에 피난민들은 극한의 고통을 당했다. 지금도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이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되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 좀 더 많은 대화의 기회를 갖고 북한 핵문제를 잘 극복해 한반도에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