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죽산기념강좌 … ‘박형룡 박사의 초기 생애’ 회고
이상웅 교수 “견인불굴의 특성과 열정 갖춘 ‘뛰어난 학생’ 증언 곳곳서 확인”

총신대학교 초대 학장이며 교단의 신학적 기틀을 세웠던 고 죽산 박형룡 박사(1897~1978)를 회고하는 신학강좌가 열렸다. 총신대학교(총장대행:박용규 교수)는 5월 16일 총신대 신대원에서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다시 보는 박형룡 박사의 초기 생애(1897~1923)’를 주제로 제14회 죽산기념강좌를 개최했다.

주제발제를 한 이상웅 교수(총신신대원)는 박형룡 박사의 출생부터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하기 직전까지 26년간 박 박사가 어떤 공부를 했고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같이 박 박사의 젊은 시절을 연구한 작업은 매우 드물었기에 이번 발표는 의미가 있었고 박 박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상웅 교수(가운데)가 죽산기념강좌에서 박형룡 박사의 초기 생애를 강연하고 있다. 이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학문적 성실성과 탁월성은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것이었으며 신실한 신앙이 큰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이상웅 교수(가운데)가 죽산기념강좌에서 박형룡 박사의 초기 생애를 강연하고 있다. 이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학문적 성실성과 탁월성은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것이었으며 신실한 신앙이 큰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이상웅 교수에 따르면 죽산 박형룡 박사는 1897년 음력 3월 28일 평안북도 벽동군(현재 북한의 자강도 우사읍)에서 출생했다. 죽산의 가정은 원래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산이 거의 없어졌으며 아버지는 대주가여서 집안에 빚이 늘 끊이지 않았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궁벽진 마을에 살다보니 어린 시절 죽산이 받을 수 있는 교육 혜택은 서당교육뿐이었다. 그는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받았으며 서당선생을 따라 교회에서 행해지는 연설을 듣기 위해서 벽동 학면교회에 출석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서당선생과 박 박사를 비롯한 아이들은 신자가 되었다.

죽산은 당시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웠던 신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게 됐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이리저리 학교를 옮겨다니며 무려 6개의 초등학교를 거쳤다. 죽산은 소학교를 졸업한 뒤 의주 양실학원 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이 역시 1년 만에 중단했다. 이 학교 교장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폐교당했기 때문이었다. 한 해를 쉬고 1913년 용평리 교회학교에 다시 입학을 했으며, 특히 한학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해 10월 벽동읍교회에서 열린 벽동군 도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설교를 통해서 깊은 영적 도전을 받았다. 그는 “이제부터는 죄에 대항하며 예수를 참으로 믿기로 결심”하게 됐다. 16세 때였는데 죽산은 매 예배에 출석할 뿐만 아니라 성경읽기, 기도하기, 그리고 개인전도에 힘을 쏟게 된다.

17세가 되던 1914년 죽산은 선천 신성중학교에 입학해서 1916년까지 다녔다. 이곳에서 중학교육을 받으며 신앙생활에 깊은 수련을 받았다. 이 시기에 죽산은 윤상온 교장과 한국인 강규찬 선생에게 큰 영향을 받았는데, 강규찬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인물이었다. 죽산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성경과 영어 선생이었던 소열도 선교사는 1971년 출간한 <음양:한국인의 목소리들>이라는 책의 한 장을 할애하여 ‘박형룡, 성자같은 학자’라는 제목 아래 죽산이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소개할 정도였다. 정규적 예배, 기도회, 주일학교 교육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일과 성경읽기에 힘써서 ‘올빼미’ 또는 ‘박 목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죽산의 경제적 형편은 여전해서 그는 목공일, 양말 짜는 일, 학교 종치기, 벽돌 지기, 변소 치기, 노동 감독 등의 일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죽산은 1916년부터 1921년까지 평양숭실전문학교를 다녔고 이 기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재학 중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생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문학부 웅변대회에 나갔고 문학보에 글을 기고했으며 4학년 말에는 <숭대 타임즈>라는 교내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을 맡기도 했다. 전도대 활동에도 열심을 내었으며 어느 해는 무려 70여 회나 강단 혹은 연단에 초대를 받았다.

죽산은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가 일본 당국의 추격을 받았고 4월 4일 배위량 선교사의 집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체포를 당했다. 여러 번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유치되었고, 한번은 감옥에서 1주간 구류를 살았다. 숭실대를 졸업한 후에 그는 예정된 숭실전도대의 전도활동에 동참했다. 이때 목포 양동교회에서 ‘천(天)의 검(劍)’이라는 설교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8개월간 투옥당했다. 출옥 후 미국 유학을 꿈꾸면서 남경 금릉대학에서 1921~1923년 공부를 했다.

발제자 이상웅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초기 26년간의 생애를 살펴보면 어려운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배움의 길을 걸어갔던 견인불굴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그는 민족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도외시하지 않고 그 아픔에 동참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그의 인고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신앙이 바탕이 됐다”면서 “죽산의 초기 생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청소년들이나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귀감이 된다”고 밝혔다. 또 그는 “신성중학교나 평양숭실전문 시절 성경의 영감과 무오, 하나님의 주권에의 확신, 주일의 성수와 경건생활 등의 특징을 배우고 익혔으며 신학자로 산 남은 생애 동안에도 이러한 점들을 ‘한국 청교도 개혁주의’의 특징들로 확집하고 고수했다”고 결론지었다.

이 교수의 발제에 대해 안명준 교수(평택대)는 논찬에서 “죽산이 받은 교육의 현장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현재 목사후보자들에게 신학교육의 연관성과 정체성,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진단해볼 수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 박영실 교수(총신댸)도 논찬을 통해서 “이번 논문을 통해 박형룡 사상의 기독교적 민족주의 측면을 참고하여 한국장로교회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신대학교는 5월 개교기념주간을 맞아 2004년부터 죽산기념강좌를 개최해 왔다. 강좌를 통해서 박형룡 박사가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을 세우고 그 신학으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틀을 만든 것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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