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역할 중 하나는 선지자적 사명이다. 선지자적 역할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깨우고 듣는 자들이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펼쳐질 새로운 하늘과 땅을 보여주는 것이다. 듣기 싫어해도 외쳐야 한다. 세상이 귀를 막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양심이 찔리기 때문인 것이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회개를 촉구하셨다. 듣기 싫은 자들이 귀를 틀어막고 그 선지자를 죽이고 말았지만 그것은 양심이 많이 찔린 죄인들의 일반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설교’의 말씀만 들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알 수 있고 그렇게 살지 못했거나 살지 못함을 회개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멀어진 거리를 좁힐 수도 있다. 결코 길지 않은 그 말씀에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이다. 따라서 그 말씀을 교회가 실천하는 것이며 세상이 감동을 받도록 힘쓰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우리처럼 되라고 외쳐야 한다. 그러나 결코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교회는 조용히 말씀대로 움직이고 그리스도인들은 감동받은 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그것이 선지자적 외침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다. 광장에 나가 큰 목소리를 내거나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향해 귀를 열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일 것이고 때로는 박수로 화답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교회를 향해 “너나 잘하세요”라며 비웃는 것 같아 참 슬프다. <친철한 금자씨>란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감옥을 나서는 금자 씨의 대사이기도 하다. 두부를 들고 몰려와 출옥을 환영하는 교인들에게 던진 이 말 한마디는 교회가 선지자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했다.

교회의 선지자 역할 회복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록 화려한 예배당을 짓지 못해도, 온갖 프로그램을 운용하지 않아도 말씀에 바로 서기만 하면 된다. 말씀대로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가르침을 따라 삶의 현장에서 소리 없이 정직하게 살면 된다. 그러나 지금 급한 것은 세상에 대한 선지자 역할이 아닌 우리 자신을 향한 선지자 노릇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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