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호 목사(동산교회)

남서호 목사(동산교회)
남서호 목사(동산교회)

크리스천이 문화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옳은지에 대한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대립유형(type of opposition)과 변혁유형(Type of transformation)이다.

대립유형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나라, 양자의 대립을 주장하며, 양자택일의 결단을 요구한다. 대립유형의 대표자로는 터툴리안, 중세기의 수도원 규정이나 소 종파 운동, 톨스토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서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유형으로 본 기독교의 최대의 대표자이다.

북아프리카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여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시키며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스토아 철학의 엄격한 도덕을 그리스도의 주권과 결부시킨다. 그는 또한 신자의 투쟁은 자연을 상대로 할 것이 아니라 문화를 상대로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죄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 문화의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원죄가 사회를 통해서 전승”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배격해야 할 가장 사악한 세상은 이교 사회와 그 종교-다신론적인 우상 숭배, 그 신조와 의식, 그 정욕적인 것과 상업화된 것이다. 이 사상은 이교도와 동맹이나 동조는 있을 수 없고 다만 배격하고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변혁유형(Type of transformation)은 대립유형과 달리 그리스도에 의한 문화의 변혁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변혁주의자들의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신학적 신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창조의 질서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통치 밑에서 창조적 능력과 말씀의 질서화에 의해서 살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성육신을 창조 세계 속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행하는 아들이 인간의 문화 속에 들어온 것으로 이해한다.

둘째, 악을 존재론적인 성질로 보지 않고 선의 부패 내지 결여로 본다.

셋째,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인정한다. 이같은 주장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이 주장하는 바이다.

바울은 모든 인간의 문화적 업적이 모두 죄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간의 활동과 제도는 그리스도의 대속행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 바울은 반문화주의자처럼 새 기독교적 율법을 지니고 문화 세계에서 이탈하여 구원받은 자의 격리된 공동체로 퇴각할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기독교적 윤리를 가르쳤다. 어거스틴의 사상에 있어서 변혁주의적 동기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그에 관한 기독론적인 해석이 결합되어 있는 데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세계가 본래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과 문화의 부패와 왜곡을 지적한다.

이 전도된 본성과 부패한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어거스틴은 또한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두 질서이며 종국에는 지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병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칼빈에 있어서 문화적 사고는 창조론에 입각해 있다. 창조론에 입각한 칼빈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자연의 질서에 입각하고 있다. 그는 바울과 어거스틴을 따라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근본주의적 반문화사상을 말하지 않고, 적극적 문화사상을 주장한다.

그가 죄로 인해 문화가 파괴된다고 주장하나, 반문화주의에 이르지 않는 것은 그의 일반 은총론이다. 일반 은총에 근거해서 칼빈은 그리스도 속죄의 사역이 없는 이방인에게도 문화가 가능한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화를 기독교가 선도하고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과거 이성,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아니 모더니즘 때만 해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역에 기독교의 문화는 찬란하게 꽃피었다. 그러나 후기현대시대에는 그렇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과학과 바이오 테크놀로지의 획기적인 발달로 변혁시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그동안 유럽과 북미지역이 그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나라들의 교회가 쇠퇴하고 경제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중국과 더불어 제3세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야말로 지금은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문화적인 혼돈과 다원주의의 기세만 강해지고 있다. 이미 성탄절의 문화, 부활절의 문화는 교회만의 행사가 된지 오래다. 문화적 변혁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곧 선교적 환경이며 배경이 된다.

이 변혁의 시대에 공백을 메울 ‘대체문화’ 창출이 시급하다. 하나님 문화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세상 문화는 세계 속에서 제법 활기를 띠고 있다. 즉 K팝, 드라마, 영화 등은 전 세계를 흥분시키고 있고 음식 문화 또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앞서가는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화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선교에 접목시키고 있다. 인간은 문화를 먹고 사는 존재요 호흡하는 존재다. 양질의 문화는 하나님의 문화다. 그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줘야 한다. 문화수준이 교회 성숙도를 좌우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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