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922년 1월 22일 운양 김윤식 선생이 88세로 영면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청렴강직한 대문장가이자 덕망과 인격의 당세대 일인자였던 고인에 대한 추모를 사설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1월 24일 언론계와 종교계 교육계와 법조계는 모임을 갖고 김윤식 사회장을 결정한다. 이를 위해 박영호와 이용직을 장례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추대한 동위원회는 사회장 관련 업무 일체를 관장하는 실행위원 10명과 그를 선정하기 위한 전형위원 등 87명의 장례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장례위원회는 한마디로 민족주의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방대한 구성이었다. 여기에 장덕수와 오상근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 상해파 일부가 적극 참여했다.

당시 민족 정론지였던 <동아일보>는 김윤식 사회장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1월 27일부터 김윤식 사회장에 대한 반대 목소리들이 표면화 되고 있었다. 당시 장례위원으로 선정된 몇몇 인사들이 자신들은 사회장 위원회에 무관하다는 취소문을 신문지상에 게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중 몇몇 인사는 사회장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반대파들은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울파인 사회 혁명당과 조선공산당 혹하사변을 주도한 이르쿠추파와 재일본조선인 공산주의 등 네 개의 공산주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선언과 7개항의 결의문을 통해 김윤식이 사회장을 치를만한 인물인가 하는 점과 동아일보사가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장례위원을 발표하여 자신들이 마치 사회의 대표인양 행세한다는 것이었다.

저들 반대자들은 1월 30일과 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반대를 위한 강연회를 개최한다. 제1차 강연회의 주제는 ‘고 김윤식의 사회장에 대하여 반대하노라’였다. 제2차 장연회 주제는 사회장을 발기한 자들, 특히 동아일보사에 대한 집중적 비판이었다. 동아일보사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장 추진 세력들인 송진우 김성수 이상협 김종성 등과 박영효 유진태 최진 이범승 이상재 등 민우회주도세력들 즉, 부르주아적 세력들에 대한 반대였다. 이들 반대자들은 저들 모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계급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저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장덕수 중심의 국내 상해파 일부를 ‘사회개량가’로 지칭하면서 적극적 투쟁을 선언했다. 한마디로 김윤식 사회장 찬반논쟁은 이 땅 위에서 발생한 최초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사회주의 세력의 충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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