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호 목사(동산교회)

▲ 남서호 목사(동산교회)

인간이 역사 이래 아직까지도 집단 내부에서 그리고 집단 간에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 크게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국가 내적, 외적 불평등의 심화와 고통,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에 있어 우리는 이렇다 할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설픈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질 면에서 부족하진 않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이 확실한 문제해결을 보장하는 것도 아님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의 합리성,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 이상, 혹은 도덕적 이상 등 인간의 정신과 상상력이 이루어 낸 많은 메커니즘이 오늘날 인간이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말의 가능성과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이 그러한 것들의 한계와 제약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인간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동료의 이익을 충분히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사회통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강제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강제성이 평화를 보장해주는 원천이 될 수 있지만 불의의 원천이 되기도 하기에 또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역사 이래 이러한 강제성을 가지는 국가권력을 손에 쥔 자는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려 왔다. 이러한 특권은 다수의 인간 존엄성 말살에 기여를 해 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호소를 통해 이러한 특권계층의 권력남용을 견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직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국가 내의 계층 간의 갈등, 국가 간의 갈등문제 모두에 적용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의 갈등과 불의의 궁극적인 원천은 인간의 죄와 무지, 이기심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자애심을 증대시켜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은 이기심을 강조, 보다 순수한 종교는 자애심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이기주의를 억제한다는 희망을 가졌고 그것이 사회문제의 해결책이라 굳게 믿어 왔다.

이기심은 바로 종교적 자애심으로 그리고 무지는 인간의 지성과 합리성, 과학 등으로 제거될 그러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종교적 이상주의나 이성적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전혀 무가치하거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에 의한, 그리고 자애심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파생물들이 과연 집단 속에서의 인간의 행동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느냐에 대해선 반신반의하다.

이성의 계발과 성장은 점차 공정하고 정의로운 관계들을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사회정의가 증진될 수 있는 가능성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개인생활에서 사회집단의 생활로 진행해 갈 경우, 이성이 충동에 대해서 갖는 비중은 점점 더 낮아지게 된다. 여기서 충동은 집단이기주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은 절대로 일반의 이익에 대한 이해를 자신의 이익에 대한 이해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높은 이성적 합리성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은 오히려 상상력이나 정신, 충동에 의해 더 많은 지배를 받으며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의 원천이 된다.

한편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면 사람들은 사회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언제나 있어 왔다. 즉 개인의 이기심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기제로써 자애심(사랑하는 정신), 회개의 감정 등을 그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이러한 종교적 감정들이 개인의 인격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사회적 차원에서도 긍정적 영향력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러한 종교적 감정들은 천상과 지상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패배주의에 휩싸여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극도의 열광주의나 금욕주의에 빠져들어서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는 나름대로의 사회 윤리적 기여를 고려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치유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한계로 인해 교회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사회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을지라도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책임사회를 이루기 위한 파트너십의 중요한 매개이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이 땅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도 교회와 목회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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