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말씀의 능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 장순직 목사(원주 드림교회)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 8:8)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엔 여러 사연과 문제 해결을 위해 대자보를 건물 곳곳에 게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자, 당시 독일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이에 반박하면서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의 정문에 95개의 반박문을 게시합니다.

올해로 루터가 반박문을 게시한지 501년째를 맞이했습니다. 500여 년 전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유럽의 역사를 변혁시키는 경륜을 이루셨습니다. 종교개혁은 곧 교회의 개혁이었고, 왜곡된 중세교회 신학의 개혁이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을 흔히 5대 솔라(Five Solas)라 부릅니다. 곧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딤후 3:16), 오직 은혜(Sola Gratia 엡 2:8), 오직 믿음(Sola Fide 갈 2:16),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 행 4:12),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 고전 10:31)입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요즘 교회만큼 강력한 개혁의 요청 앞에 직면한 조직도 많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중세의 교회 형편보다 부패하고, 소돔과 고모라 시대보다 음란해져가는 시대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처럼 ‘아드폰테스’, 즉 본질의 회복을 추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 아드(Ad)란 ‘…으로’, 폰테스(fontes)란 ‘원천, 본질 혹은 근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 ‘아드폰테스’입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현상에만 급급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철학에서는 보이는 세계를 현상이라 일컫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질이라 일컫습니다. 그리고 본질이 현상보다 중요하고 앞선다고 말합니다. 곧 인류 역사 속 모든 순간의 현상들에서 찾는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본질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안타깝게도 진리의 본질을 자꾸 벗어나 현상으로 치우쳐간다는 것입니다. 촌부로부터 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깁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본질’에 관한 것인데 반해,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현상’에 쏠려 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본질에 충실하다 보면 현상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건만 우리는 여전히 현상에 목이 말라 헐떡이며 교회를 드나듭니다.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희망이며 등불입니다. 비록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마지막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했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시급히 개혁의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경은 125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15억권 이상 보급되었으며, 연간 3000만권 이상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에 영원한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 기독교는 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대단히 핍박했습니다. 공산당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는 감시 때문에 성경을 곁에 두지 못하고, 은밀하게 땅에 묻어 숨죽여가며 읽던 일도 있었습니다. 북한 땅에서는 아직도 성경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설사 가진다해도 마음대로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큰 소리로 읽어도 어느 누가 핍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가졌다고 시비 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제일 많이 보급된 동시에 제일 안 읽는 책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본문에 보면 2~3절에 제사장 에스라가 모든 사람 앞에서 말씀을 읽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의 단초는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열왕기하 22장에 등장하는 당시 유다 왕국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이방신을 섬기며 단을 세웠습니다. 심지어 므낫세 왕은 자신의 자식들까지 우상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즉위 2년 만에 암살을 당하고, BC 622년경 여덟 살이 된 요시야가 등극합니다. 그는 어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습니다. 왕의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도록 명령합니다. 그렇게 성전 수전이 진행되던 어느 날,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서기관 사반을 통하여 왕에게 보고합니다.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이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 앞에서 읽으매”(왕하 22:10). 드디어 말씀으로 돌아온 요시야 왕은 회개하며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왕이 다시 이 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게 될 때, 유대 왕국에 거대한 변혁과 부흥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5절에는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다 일어섰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대에는 말씀하시길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2)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들의 시대도 그렇습니다. 말씀은 홍수처럼 많은데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심령으로 받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경고하시는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정말 비통한 심정으로 외쳐도 반응이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지적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데서 오는 기근’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에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라고 했듯,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 앞에 “아멘 아멘”하며 일어설 때 민족과 교회의 개혁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철옹성처럼 단단히 거부하는 세대에도 말씀이 들려지면, 말씀을 듣게 되면, 말씀 앞에 서게 되면 말씀은 예리하게 활동합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는 말씀 앞에 반응을 보이며 말씀으로 살려는 자들의 삶이 그들 눈앞에 나타나면 가능한 일입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산촌과 어촌에서 말씀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본문 8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라는 대목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는 ‘깨달음’에 대해 무려 여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말씀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 듣고 또 들어도 깨달음이 없으므로, 텍스트를 외면한 채 현상만 바라보고 쏠림과 이탈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상만 좇다보니 말씀 앞에 반응을 보이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시편 106편 7절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이한 일들을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며, 거역하는 세대는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못하면 쓰러지는 세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34절에서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 서서 전심으로 지키겠다고 고백하며 기도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을 만져주십니다. 우리 세대를 만져주십니다. 이 땅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 9절에 이르러 드디어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읽고 깨달아 울기 시작할 때, 비로소 교회는 자정이 가능한 변화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입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