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제임스타운은 북미대륙의 첫 번째 정착촌이다. 1588년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대양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의 명령을 받은 월터 라울라는 북미대륙 탐험 길에 오른다. 그는 플로리다 이북의 해안을 탐사하고 이곳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땅이라고 버지니아 즉 처녀(Virgin)였던 여왕의 별칭을 따 버지니아(Virginia)라고 불렀다.

당시의 버지니아는 오늘의 버지니아보다 훨씬 드넓은 북미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보다 3년 전인 1585년 노스캐롤라이나 로아노크섬에 최초로 영국인 117명이 상륙정착을 시도했으나 의문의 실종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당시 인디언 마을에 백인소녀가 산다는 풍문이 있었다는데 아마도 일부는 원주민에 동화되었거나 대부분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607년 영국인들의 첫 정착촌이 세워지는데 버지니아 체사피크만에 설립된 제임스타운이었다. 당시 28세의 존 스미스 대장과 144명의 정착촌 건설자들은 이 타운 명을 당시 국왕 제임스 1세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저들은 1년 전인 1606년 자신들의 조국인 영국을 떠나 5개월의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한다. 저들을 싣고 온 배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이었고 이 때문에 배 이름은 미국역사에서 새로운 탐사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는 부푼 희망으로 견딘 5개월의 항해 후 정착한 북미대륙은 한마디로 고난의 땅이었다. 1608년 정착한지 1년 만에 생존자는 144명 중 38명만 남고 모두 사망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저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듬해 영국정부는 제임스타운을 살리려고 5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보냈지만 1610년 주민 모두가 사망 60명만 남은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마침내 저들은 제임스타운을 포기하고 1610년 6월 10일 대책도 없이 바다로 뛰쳐나와 배에 몸을 싣는다. 바로 이때 영국에서 구호선이 왔는데 델라웨어(Lord De La ware)가 이끌고 온 딜리버런스(Deliverance)로 ‘구원’이라는 배였다. 델라웨어는 이들을 설득 다시 제임스타운으로 돌아가게 했고 저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게 된다. 제임스타운 주민들은 이날을 ‘섭리의 날’로 부르며 매해 기념일을 지켰다. 바로 이 사람 델라웨어의 도움으로 세워진 주가 오늘의 델라웨어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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