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행 목사 평전>, 교단과 한국교회 섬긴 눈물의 목회여정 담아

▲ <서기행 목사 평전>은 한 마디로 자식과 가족은 물론 한국교회에 신앙과 기도와 헌신의 유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줄 수 없다는 서 목사의 심언(心言)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정치 10단’ 혹은 ‘호남의 대부’라고 부른다. 총회내 정치의 계절이 오면 반드시 그를 넘어야 한다는 속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그는 총회의 ‘큰바위 얼굴’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 그가 본인의 이름으로 <서기행 목사 평전>을 출간했다. 물론 평전은 사위인 총신대 신학대학원 문병호 교수가 썼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가정사를 다룬 소사(小事)에 그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서기행 목사의 유년시절부터 목회여정, 그리고 총회와 한국교회를 섬겼던 일대기를 가감없이 정리하여 정설(定說)에 가깝다. 다만 서 목사가 총회정치를 하면서 워낙 무게감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야사(野史)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서기행 목사 평전>은 오롯이 목회현장에서 양들을 돌보며 정통 보수신학을 지켜나가는 서 목사의 ‘목회원리’만 담겨 있을 뿐이다. 서 목사는 초등학교 때 막내 여동생을 통해 신앙에 눈을 떴으며, 성균관대 법대 출신인 둘째 형을 통해 독서와 공부하는 법을 체득했다. 그러나 그를 ‘큰 산’으로 키운 것은 자식을 위해 평생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서 목사가 왜 개혁주의 신앙을 보수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반대하는가를 행간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첫째는 1955년 총신대 예과에 520명이 입학했는데 통합측이 이탈할 때 극소수 인원만 남고 모두 빠져 나갔다. 당시 신학생이던 서 목사는 박형룡 박사와 명신홍 박사의 지도를 받기 위해 총신을 지켰다. 둘째는 1980년 비주류가 이탈하여 결국 개혁측이 분리되어 나갈 때도 그는 예장합동 교단에 남았다. 당시 그가 섬기던 대성교회도 영향력 있는 장로님 중심으로 많은 성도가 개혁측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총회에 분열이 없었다면 대성교회 분열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말한다.

그런 상처가 깊은 아픔을 겪으며 서 목사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역설이지만 만일 서기행 목사가 없었더라면 예장합동과 예장개혁의 합동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서 목사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교단 합동에 목숨을 걸고 매진했다. 그런 내용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그는 총회내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목회자로서도 그리고 부흥사로서도 인정받는 ‘능력 많은’ 인물이었다. 정치를 하면서도 평생 본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인도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부정적인 말은 절대 하지 않으며, 늘 짧고 간단한 말투로 끊고 맺음을 정확히 했다. 그래서 차가운 면이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가난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보는 심성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높은 분’ 보다 ‘낮은 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관계의 첫걸음이다.

“아버님은 사사로운 일을 절대 금하셨습니다. 실무적 역량이 뛰어난 일꾼들을 옆에 두었지만 교회에서 무명한 것 같지만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과 작은 일에라도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돈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남에게 주실 줄은 알지만 부정하게 받지는 않으셨습니다.”

<서기행 목사 평전>은 한 마디로 자식과 가족은 물론 한국교회에 신앙과 기도와 헌신의 유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줄 수 없다는 서 목사의 심언(心言)이 그대로 담겨있다. 일독을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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