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걸 목사 자서전 <하나님! 절 울리셨습니다> 출간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교회’ 간절한 바람 담아

▲ 은퇴 후 부산으로 내려가 살고 있는 송용걸 목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영혼을 살리는 삶을 산다는 생각이다. 특별히 교회에서 상처받아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 기도 중이다.

사람의 일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방대한 인생 여정을 다 담아낼 단어도 없을뿐더러, 희로애락 어느 하나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신천교회에서 은퇴한 송용걸 목사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을 몇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께 떠밀려 살았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살았다.

그 시절 사람치고 고단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그는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눈물로 겪었다. 황해도 안악에서 유복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어머니는 고작 24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피난살이를 하며 숱한 고난을 겪었고, 자라는 동안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원인불명의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어머니와 함께 찾은 기도원에서 기적적으로 완쾌됐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드리겠노라 다짐을 했고, 연세대 신학과를 거쳐 총신대학교에 재입학해 지금까지 50년을 목회자로 살았다.

그의 목회 여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스무 살 때 삼일교회 전도사로 청빙 받은 것을 시작으로 당시 교회 안에 칼빈대가 있던 평안교회에서 초빙을 받아 사역했고, 미국으로 건너간 직후에는 나성빌라델비아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했다. 개척 역시 순조로워 오렌지카운티에서 개척한 미션힐교회와 시카고에서 개척한 헤브론교회는 둘 다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이 미국에 갔었는데, 간 지 사흘 되던 날 우연히 당시 LA에서 가장 큰 교회인 나성빌라델비아교회 수요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바로 부목사로 사역해달라고 요청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죠.”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목회에 대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큰 것으로 맡기신다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시카고 헤브론교회에서 20년 4개월을 사역하고, 60세에 서울 신천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헤브론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 받아 편안히 노후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남은 생애를 조국 교회를 섬기라는 마음을 주셨고, 그는 묵묵히 순종했다.

그는 눈물의 목회자이기도 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을 보며 울었고, 고난과 슬픔을 겪고 있는 교인들을 붙들고 울었다. 무엇보다 그는 북한을 놓고 많이 울었다. 아버지를 한국전쟁 때 여의고, 전도사였던 외할머니가 공산당에 의해 수많은 고초를 당했지만, 그에게 북한은 외면할 수 없는 고향 땅이었다. 그러기에 북한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했고, 특별히 북한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다.

“미국에 있을 때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수차례 북한을 다녔어요. 내 눈물에 감동한 교인들이 모은 돈으로 고아들을 도왔죠. 앞으로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북한에 들어가고 싶어요.”
그는 최근 자신의 인생 여정을 정리해 <하나님! 절 울리셨습니다>(도서출판 영성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펴냈다. 책에는 그가 평생을 아버지처럼 섬겼던 고 이성택 목사와의 기억을 비롯해 고 옥한흠 목사, 하용조 목사 등 선후배 목회자들과의 인연도 담겨 감동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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