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에마누엘 카통골레와 크리스 라이스는 <화해의 제자도>에서 “역사는 악과 불의에 연루된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 경고한다”고 일침합니다. 지금 이 일침 속에 우리 교단의 총회와 신학교가 있음을 생각하면 참담합니다.

우리 교단을 향해서 한국개신교회의 최대 교단, 장자교단이라는 말을 합니다.

또 우리 총신대학교, 총신을 향하여 세계 최대의 개혁신학의 요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총회는 한 개인이 신학교를 사유화하려고 한다는 명목으로 교단의 몇몇 정치 실세들이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총신측 인사들은 교단의 실세들의 사유화에 맞서 사법화했습니다. 결국 총회는 총신을 사유화로부터 지키지도 못했고, 사학법에 근거한 사법화를 부추긴 꼴이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목사, 장로 그리고 성도들 역시 총회와 총신을 미워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신앙과 신학의 모체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총회측 인사와 총신측 인사들은 계속해서 이전투구의 싸움을 하며, 이판사판의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개혁신학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출구가 없다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출구를 막아 놓고, 출구를 찾지 아니해서 싸움이 되었습니다. 미로에도 출구가 있는데, 출구가 보이지 않고, 출구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총회측도, 총신측도 출구를 찾고, 닫아 놓은 출구를 열어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형통한 날의 은혜>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기가 아니라 새로운 작전이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총회측과 총신측은 새로운 경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작전, ‘작전명-출구를 찾자’는 작전으로 경기에 임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작전은 경기에 있어서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102회 총회가 끝나면 총신의 문제는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상황은 악화되었고, 이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가치마저도 부정되어 버리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총회측 인사도, 총신측 인사도, 아니 우리 모두가 신앙과 신학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지녀야 할 믿음과 경건은 잃고 경건을 자기유익과 이익의 재료로 삼아버렸습니다. 목사는 교회 성장을 위해서 ‘비즈니스 맨’이 되어야 되는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교회의 질서와 조직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자본과 경영의 논리가 대체되어,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맘몬을 추구하고 독려하고, 신앙과 욕망은 교회의 제도 속에, 그리고 성도들의 실생활에서 하나가 되는 현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총회를 책임지고 있는 총회장만의 문제도 아니고, 총신을 책임지고 있는 총장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실상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출구를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는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총신이 총장의 것도 아니고, 총회가 몇 사람의 정치적 실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출구를 찾는 데는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되어진 일들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계산을 하지 맙시다. 무슨 생명 보험에 가입하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용서해야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또한 용서하는 자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총회측과 총신측이 작전 타임을 요청하고 누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닌 함께 이기고, 함께 지는 게임을 위해서 피차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대방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조율하여 출구를 찾는, 아니 만드는 새로운 작전을 구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젠, 그만 합시다. 서로의 몸값, 가격을 올리려고 하다가 가치를, 우리 개혁신앙과 신학의 가치를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만들어 가지 못한다면 역사는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해서 악과 불의에 연루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기술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끄러움의 역사, 수치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의 가치, 신학의 가치를 찾는 역사의 주인공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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