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동행르포] 복음선 ‘등대3호’ 섬사역 함께하다

4년전 국내선교사로 파송, 낙도선교 위해 예닐곱개 자격증 딴 사모와 전천후 섬김 사역
외로운 낙도주민 위한 해결사 역할 진력 … “땀과 눈물의 기도가 반가운 등대역할 되길”


얼마 전 ‘병원선’이란 TV드라마가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기독교계에도 비슷한 배가 있다. 낙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복음선이다. 외떨어진 섬을 닮아, 알아주는 이 적고 화려하진 않지만 복음선은 그 존재 자체로 고맙다. 한나절 복음선 ‘등대3호’에 몸을 실었다. 섬사람들의 주름진 애환과 복음선 사역자의 애틋함이 파도인 양 넘실거렸다.<편집자 주>

“겨울에 이런 날은 정말 드물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파도가 높아 배를 못 띄웠거든요.”
귀한 손님이 와서 이렇게 날씨가 좋은 것 같다며 이정환 선교사(50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설핏 들었던 잠이 훌쩍 달아났다.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전남 완도군 약산면 당목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그러나 아직도 뭍이었다. 이 선교사는 당목항에서 다시 배로 20분쯤 가야 닿는 섬, 금일도에 살고 있었다.

이 선교사는 2013년 12월 29일 부목사로 사역하던 구미상모교회(김승동 목사)에서 낙도 사역을 위한 국내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그리고 열흘 남짓 지나 가족과 함께 완도군 금일도에 내려와 지금껏 섬사람으로 살고 있다.

“금일도 일대가 다시마와 미역, 전복 주산지에요. 다시마는 전국 생산량의 80% 가량이나 된대요. 다른 곳에서 나는 다시마보다 맛이 좋아서 인기가 많아요.”

바다 위 부표를 보며 “이건 다시마 양식장, 저건 미역 양식장” 구분하는 것 하며, 구수한 남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쓰는 것 하며, 이 선교사는 4년차 섬사람이 아니라 어느새 금일도 토박이가 돼 있었다.

이정환 선교사의 ‘등대3호’는 금일도 남쪽 월송리 해송림 선착장에 정박해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배가 드나드는 시간이 제한돼 있지만, 선착장 남쪽으로 산언덕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사택도 근처에 있어 태풍이 올 때면 서둘러 배 단속도 할 수 있었다.

배에 오르고 이 선교사는 여느 때와 같이 아내 신영삼 사모(47세)와 함께 출항을 준비했다. 부부는 금일도에 내려온 후부터 늘 함께 움직였다. 배를 정박시키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날도 아내는 남편이 방파제에서 끌러 던져준 닻줄을 능숙하게 감고, 배 옆구리에 있는 보호밴드들을 끌어올렸다. 장비를 다루는 폼이 남편 실력 못지않았다.

▲ 이 선교사 부부가 부엌 싱크대를 교체해 줄 생각으로 부엌 높이를 재고 있다

사모의 역할은 그것뿐이 아니다. 이 선교사 부부는 봄부터 초겨울까지 섬들을 찾아 미용 봉사와 발마사지, 일손 돕기 등을 하는데, 이중 미용 봉사는 사모가 주인공이다. 아침에 섬에 도착해 해질녘까지 사모는 20명 가량 머리를 손질하는데, 그 시간 동안 이 선교사는 옆에서 미용 보조를 하며 성경 말씀을 나누고 복음을 전한다.

사모는 완도에 내려오기 전 미용기술 외에도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노인요양보호사, 한식과 양식조리사 자격증 등 예닐곱 개 자격증을 땄다. 오롯이 낙도 사역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솜씨를 살려 김치를 담그고, 반찬거리를 마련해 섬에 사는 독거노인들을 섬겼다.

“텃밭에 유자나무도 심었어요. 아내가 직접 유자청을 만들었는데, 미용 봉사를 할 때 한 잔씩 대접을 하면 좋아들 하세요.”
뭍에서 살았으면 이 고생을 했을까 싶어, 아내를 바라보는 이 선교사의 눈은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이다.

이 선교사는 조타키를 잡고 조심히 등대호를 움직였다. 오늘 방문할 곳은 40여 분 거리에 있는 다랑도. 미용 봉사는 미리 약속을 정해야 하는데, 요 며칠은 날씨가 궂어 시간을 잡지 못했다. 대신 오늘은 다랑도 교회 목사 앞으로 배달 온 소포들을 전해주려 나선 것이다. 소포는 겨울 옷가지와 이 선교사가 선물로 마련한 전기매트였다.

“다랑도는 여객선이 안다녀요. 날씨도 추워지고 해서 얼른 가져다 드리려고요.”

파도  이 선교사는 조타키 옆과 위에 달린 두 개의 지피에스(GPS)를 번갈아 보며 배를 조종했다. 아는 길이라고 방심할 수 없었다. 4년 가까이 배를 조종하고 있지만 바닷길은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배를 몰고 나올 때만 해도 호수 같던 바다가 어느 틈엔가 가파른 파도로 변해 있기 일쑤였다. 갑작스런 큰 파도에 휩쓸려 조타키를 놓고 어찌할 바 모를 때도 있었고, 엔진 고장으로 한참을 표류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면 아내는 한참 동안 배 타기가 두려워했고, 이 선교사는 미안함에 짐짓 태연한 체했다.

이 선교사는 완도에 내려오기 전 해기사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실제 배 조종은 선배 사역자인 등대2호 김요셉 목사에게 배웠다. 1998년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수십여 척의 복음선이 있었다. 그러다 외환위기로 교회 지원이 줄어들면서, 복음선도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남아 있는 복음선 중 4톤여 규모의 큰 복음선은 낙도선교회(대표:박원희 목사)와 협력하고 있는 등대1,2,3호가 유일하다. 등대1호는 완도 서부권을, 등대2호는 진도권을 맡았고, 등대3호는 완도 동부권을 맡아 남해 서부권 벨트를 이뤘다. 그나마 등대1호는 사역자였던 이상현 목사(완도한빛교회)가 지난해 별세해 사역을 잠시 멈춘 상황으로, 현재 완도와 진도 일대에서는 이정환 선교사와 김요셉 목사가 유일한 순회 사역자다.

▲ 이정환 선교사 부부가 다랑도선교교회 예배당에서 신평중 목사 부부와 함께 기도하고있다.

“등대호란 이름이 복음의 빛을 밝히는 거잖아요. 등대가 멀리 이어진 것처럼 순차적으로 지역을 넓혀가자는 생각이죠.”

출발한지 25분쯤 지났을까, 이 선교사가 배를 멈췄다. 금일도에서 가장 가까운 우도 앞바다였다. 이 선교사는 뱃전에 서서 손가락으로 섬들을 가리켰다.

“덕우도 63가구, 우리 교단 교회가 있고 성도는 4명. 황제도 15가구. 2시 방향에 장도 2가구, 이때쯤에는 추워서 2가구 다 여수에 나가 있어요. 그리고 12시 방향에 다랑도 12가구….”

이 선교사 부부가 순회하고 있는 12개 섬들 중 남쪽 바다에 있는 섬들이었다. 이 선교사는 가구수 뿐만 아니라 주민들 이름과 나이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고, 따로 신상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섬 상황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모습에서 이 선교사가 그동안 흘렸을 땀과 눈물이 그대로 느껴졌다.

등대  사역 초창기 때 이 선교사는 전략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섬 주민들과 관계 형성이 안 된 상황에서 무턱대고 복음을 전했다가는 섬에 접안하기도 힘들 수 있었다. 대신 자주 찾아가 미역과 다시마 말리는 일을 돕고, 발마사지를 해주고, 간식거리를 대접하며 주민들을 섬겼다.
“처음 1년 동안은 파도가 심해도 배를 띄웠어요. 이장님이나 어촌계장님과 한 약속을 지켜야했거든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섬을 찾아요. 덕분에 초창기에는 거부감이 컸던 분들도 지금은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시는지 몰라요.”

등대3호는 20여 분을 더 달려 다랑도 선착장에 닿았다. 선착장에는 주민 몇 명이 다시마를 말리고 있었다. 이 선교사가 배를 정박하고 짐을 내리며 “잘 계셨소?” 말을 건네자, 이내 투박하지만 속 깊은 인사가 날아왔다.

“짐 놔두소. 오토바이로 실어다 줄랑께.”
교회로 오르는 언덕길에 만난 80대 할머니는 첫 마디가 “파마 해야 하는디”였다.
“오늘은 사역하러 온 거 아니라 교회에 뭐 갖다 드리러 왔어요. 또 올게랑.”

이 선교사는 할머니에게 조만간 다시 오겠다며 걱정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랑도 여인네들이 파마를 하러 금일도로 나오려면 시간도 있어야 하고, 배편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돈이 걸렸다. 파마 값에 점심이라도 먹을라치면 4∼5만원은 족히 들었다. 섬에도 빈부격차가 있어 1년에 억대 수입을 올리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난했고, 그들에게 파마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 선교사 부부는 섬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들이다.

다랑도선교교회는 섬 중턱에 있었다. 빛바랜 나무 간판이 없었다면, 그냥 오래되고 허름한 가정집이라 해도 진배없었다. 예배당은 집 안에 있는 방 한 칸이었다. 그곳에서 주일이면 목사는 좌식 탁자 앞에 앉아 설교를 했고, 탁자 너머로 서너 명의 교인들이 말씀을 들었다.

다랑도선교교회는 지난 여름 몇 개월 동안 목사가 없었다. 73세의 목사가 은퇴를 하고 교회를 떠났고, 몇 개월 후 72세의 신평중 목사가 부임했다. 신 목사는 완도 횡간도에서 16년 섬 목회를 하다 은퇴를 하고 뭍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러다 다랑도선교교회에 목사가 없어 교인들이 예배를 못 드린다는 이야기에 아내와 함께 앞뒤 가리지 않고 부임을 자처했다.

“남은 여생 더 하나님께 충성하려고 왔지, 뭐 별거 있나”
편히 쉬셔야 할 연세에 왜 다시 섬으로 오셨나는 우문(愚問)에 신 목사는 담담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십수년 전 남편이 횡간도로 섬 목회를 간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아내는 이번에는 다랑도 행을 반대하지 않았다. 추운 바닷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허름한 집에, 사례도 없는 목회 형편이었지만 아내는 남편을 따라 다시 섬으로 들어왔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하나님이 가라시면 아골 골짜기도 가야지.”
아내의 말은 남편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 선교사가 낙도 선교는 10년쯤 해야 사역자라 말할 수 있다며, 자신은 이제 병아리 수준에 불과하다고 하더니, 신 목사 부부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이 선교사 부부는 다랑도 마을회관에도 들러 능숙한 남도 사투리로 주민들의 안부를 묻고, 다랑도선교교회 자랑도 했다

바람  이 선교사는 섬 마을 주민들에게 미용 봉사를 하며 전도를 하는 가운데 섬마을 교회와 목회자들을 섬기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12개 섬 중에서 교회가 있는 섬이 7군데, 교회가 없는 섬이 5군데였는데, 목회자들은 대부분 사례가 없었고 자연히 주민들보다 가난했다.

“목사님들이 주민들 경조사 챙기기도 어려운 거예요. 교회당이랑 사택 환경도 열악하고…. 파송교회나 아는 교회에 부탁도 하고, 낙도선교회 본부에도 연락해서 사택 수리도 하고 교회당 보수 공사도 했어요.”

그렇게 이 선교사를 통해 수리한 교회당과 사택이 예닐곱 곳에 달한다. 지난 11월에는 넙도교회당 사택을 보수했다. 그동안 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던 섬 마을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발품을 팔아 자재를 마련하고 공사에 손발을 걷어붙였다.

여름에는 단기선교팀을 연결시켜 교회 이름으로 섬 마을 전체를 섬기도록 했다. 독거노인들을 위해 단열벽지를 붙여주고, 방충망과 문고리를 교체했다. 대규모 미용팀과 의료팀이 와서 마을 전체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올해 여름에만 구미상모교회를 비롯해 11개 단기선교팀이 이 선교사와 연결돼 섬 마을을 다녀갔다.

“처음에 순회 사역을 할 때는 방문을 꺼려하는 목사님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제가 현지 사역자보다 앞서지 않고, 철저하게 그림자처럼 돕기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론 간격이 많이 좁혀졌어요.”

다랑도선교교회에도 이 선교사는 같은 마음이었다. 특별히 노 목사 부부가 거처할 허름한 집이 마음에 걸렸다. 열악한 사실을 구미상모교회에 알렸더니, 젊은 집사 몇 명이 달려와 급한 대로 낡은 벽지를 걷어내고 단열벽지를 붙였다.

이날도 이 선교사는 부엌이며 화장실이며 여기저기를 사진으로 찍었다. 싱크대도 갈아드리면 좋겠고, 화장실도 수리해주고 싶었다. 그 모습에 신 목사의 아내는 “우리는 겁나게 편안하다”며 “우리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먼저 도와주라”며 손을 내저었다.

4시쯤이면 해송리 선착장에 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다랑도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신 목사의 아내는 손님이 왔는데 밥 한 끼 대접을 못했다며, 연신 “으메, 미안해서 어짜까”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이거라도 자시라”며 감을 하나씩 건넸다. 감은 서리를 맞았는지 볼품이 없었는데, 그래서 늙은 사모는 조금 주저하는 눈치였고, 그 모습에 이 선교사 부부는 냉큼 감을 받아 들었다.

신 목사 부부는 등대호가 다랑도를 한참 벗어날 때까지 선착장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섬을 벗어났을 무렵 이 선교사가 말을 꺼냈다.

“사실은 다랑도선교교회가 비었다는 소식에 젊은 목사 두 명이 지원을 했어요. 등대호에 태우고 섬으로 갈 때는 ‘주여 주여’ 하고 기도도 하고,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양도 했는데, 막상 답사를 다녀온 후에는 아무 연락이 없는 거예요.”

이 선교사는 그러면서 섬 목회자들은 그냥 견뎌주는 것 자체가 존경스러운 일이라며, 사역 초창기 때는 눈물을 이만저만 쏟은 게 아니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넸다. 차마 못 다한 이야기,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가 하나둘 파도를 타고 흘렀다.

어느 틈엔가 바람이 거세졌다. 이 선교사는 금일도를 ‘바람의 땅’이라 불렀는데, 다랑도 앞바다도 바람만큼은 뒤지지 않았고, 그 바람에 슬그머니 눈물도 맺혔다.

이 선교사의 집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보니 정말 해송림 선착장에는 물이 한껏 빠져 있었다. 어슴푸레 어둠이 내려앉은 선착장 아래로 등대3호가 소금기를 잔뜩 머금고 다음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정환 선교사가 조타키를 잡고 등대3호를 조종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낙도 선교는 무엇보다 복음선 사역자와 섬 목회자간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섬 선교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내가 섬 출신이고 섬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잘 아니까, 하나님 저를 써주시면 어떠십니까? 그렇게 기도했죠.”

구미상모교회는 7년 동안 평신도로 교회를 섬긴 그에게, 신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사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교역자로 사역하기 위해 써 낸 ‘비전서’에서도 그는 섬 선교에 대한 부르심과 소망을 기록했다. 그리고 구미상모교회에서 19년을 사역한 후 마침내 2013년 12월 29일 구미상모교회 낙도 순회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구미상모교회는 ‘등대3호’ 건조비 전액을 지원하고, 지금도 매월 등대3호 사역비를 후원하고 있다.

“김승동 목사님과 구미상모교회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죠. 제게는 정말 아버지 같은 목사님이고 어머니 같은 교회예요.”

그는 완도에 내려오면서 순회 사역자로 살기로 다짐했다. 목회를 겸하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철저히 낙도 선교에 전념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낙도 선교를 위해 저를 20년 가까이 준비시켰잖아요. 한 영혼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전도하고 어려운 낙도 목회자들을 돕는 일에 온전히 사용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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