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신 목사(익산 북일교회)

▲ 김익신 목사(익산 북일교회)

필자에게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이 하나 있다. 주변 교회에도 승합차량이 거의 없던 시절, 이웃 지역에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다. 보통 저녁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걸어서 가기가 부담스러워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아 성도들을 태우고 다녀왔다. 이런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구역예배 때마다 은혜는 차고 넘쳤으며 항상 방을 가득 채우는 모임들이 이어졌다.

한국교회사에 유례가 없던 부흥의 시절이 있었다. 변변한 찬양테이프 하나 없던 시절에 오히려 찬양은 다윗의 찬양만큼 뜨거웠다. 말씀 한 번 듣기 위해 초롱불을 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웃교회 부흥집회에 참여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은 가히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호야 불을 밝히고 예배를 드릴 때도 그 불빛에 비친 성도들의 얼굴은 천국민의 모습들이었다.

의자가 없었지만 마룻바닥에서 무릎 꿇고 콧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닿을 때까지 통회하며 간절히 주를 찾았던 아름다운 기도가 있었다. 화려한 악기가 없었어도 풍금에 따라 부른 노래들은 힘이 있었다. 굶기도 하면서 목회를 하였고 자녀가 학비를 달라고 하면 바다 개펄에 내려가 고동을 잡고 꼬막을 긁어모아 팔아서 학비를 대기도 했다. 하지만 목양일념으로 주만 바라보며 목회와 가정을 지켜왔다. 그때는 교회들이 천막을 치고 황량한 벌판에 십자가를 높이 올리기만 했어도 불같이 일어나는 부흥이 있었으며 그 결과 어느 곳에서도 십자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풍요롭게 변했다. 물론 지금도 최하의 삶을 살며 옛날과 다름없는 고통의 삶을 누리시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옛날같이 굶지는 않는다. 너무 편해졌다. 풍부해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교회는 무너져간다. 이유가 뭘까? 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편한 것에 서서히 익숙해 가고 있으며 편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기도가 되질 않는다. 아니 기도를 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절박한 마음도 없다. 쉬고 싶으면 쉽게 쉰다. 여행가고 싶으면 쉽게 여행을 간다. 주일도 의미가 없다. 양들의 울음도 나를 잡지 못한다. 그냥 편하게 여행을 떠난다. 건강한 양들로 기르기 위해 영양가 있는 젖을 만들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꼴만 먹이려고 한다. 무슨 일이든지 하기 싫으면 쉽게 포기한다.

연합의 어려움이 싫다. 그냥 내교회만 잘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교회 잘된다고, 괜찮다고 자랑하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너무 쉽게 타인을 정죄하며 선을 긋고 나만의 세상에 산다. 그래서 굳이 고생하며 연합을 하지 않는다. 성도들에 대한 절박한 안타까움도 없다. 울지 않는다. 목회도 편하게 하고 싶다. 마냥 편한 것이 좋다.

실용주의가 교회 성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 성장은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의 로망이다. 예수님은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천국복음을 위해, 유리하는 양들을 위해, 영혼들을 찾아다니셨다. 그러나 교회 성장학의 논리나 교재를 보면 실용주의와 세속적인 경영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눈여겨보며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시장논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을 엄하게 경고하셨다.

우리는 편한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심을 빨리 직시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 된다. 편하게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양들을 위해 울며 그들의 삶과 함께 하며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야 한다.
필자는 1974년 여의도광장에서 부르짖었던 그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지금도 그 때의 부르짖음을 유지하려고 항상 싸우고 있다. 주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최고의 실천목회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세우려는 장로들과 온 성도들도 동일한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영적인 웰빙주의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집어 삼켜 버렸다.

우리 삶에 편한 것을 의도적으로 버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고 수송하는 것보다 먼지를 마시지 않고 편안하게 승합차로 이동하는 것이 편하다. 그냥 바닥보다 의자에 앉아서 듣는 것이 집중하는 데도 훨씬 좋다. 하지만 우리가 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영성이나 교회관이나 사역관이 무너지는 것이 무섭다. 한국교회를 우려하는 말들이 많고 원인 분석도 참으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꼭 찾아내야 할 것은 너무 편한 것을 좋아하는 시대적 상황이 아닐까?

우리는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늘 원한다. 부흥을 꿈꾼다. 천국과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교단이 바르게 세워지고 한국교회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해서는 안된다.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게 되며 나의 땀방울이 없는 것은 쉽게 날아간다. 주님의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보인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수고한 것들이 헛되지 않기 위해 편하기를 거부하라고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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