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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고난의 유익(벧전 1:6~9)김영복 목사(성실교회)

시련을 통해 믿음은 더 단련됩니다
예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새롭게 변화되는 하늘 백성이 돼야

▲ 김영복 목사(성실교회)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성도에게 4월은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로 이어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생애의 절정을 묵상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려고 하는 의미 있는 달입니다(골 1:24).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의 급진적인 발전과 물질적 풍요 가운데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도덕성과 영성이 급속히 타락하여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와 같이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걷잡을 수 없이 만연해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현상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은 우리의 신앙과 사명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비록 차원은 다를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극복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죄악과 싸우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을 지키며 사는 성도들이 전쟁의 위협, 이슬람의 위협, 다음세대의 쇠퇴, 동성애를 비롯한 반기독교적 시대흐름 등으로 고통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2017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2026년이면 65세 이상이 20%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절벽(Demographic Cliff)’ 현상도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 가운데 하나입니다.

골프가 많이 보편화 된 줄 압니다. 골프 좋아하는 분들은 언제나 골프를 생각할 정도로 골프가 좋다라는 것이지요. 골프 코스에 해저드(hazard)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스 여기저기에 장애물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무가 가로 막고 있기도 하고, 연못이나 물웅덩이도 있고, 모래 구덩이(bunker)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골프를 즐기는 분들이 왜 이런 것들을 코스에 만들어 놓았느냐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저드가 있기 때문에 골프는 더욱 재미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골프 코스가 아무런 해저드 없이 평범하고 쉬운 코스만 있다고 생각해 보면 무슨 재미로 골프를 칠 것이며, 실력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나름대로의 고난이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과거에 어떤 일로 힘들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금 고난 중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 고난이 찾아오게 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수술대에 오르거나 불구의 몸으로 남은 생을 불편하게 살기도 합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장래의 문제로 깊은 시름에 잠기고, 불편한 인간관계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것이 두렵고,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마음의 상처로 몸져눕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또 테러와 전쟁과 자연재해 같은 재난은 국가적인 고난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찾아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며, 또 어떤 방식으로 헤쳐나아가야 할지를 지혜의 말씀을 통해 얻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갖고 있지만, 이 땅에서는 비난과 조롱과 박해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베드로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을 저주 받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힌 이상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황제숭배를 거절하여 무신론자 혹은 반역자로 여겨졌고, 이방신들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절하므로 이 제사와 연관된 사업에 참여하여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는 세계제패나 패권주의에 동의하는 대신 봉사와 섬김의 삶 때문에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만찬을 시행할 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신자들은 갓난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린구유(Derinkuyou, 깊은 우물)’를 방문했을 때에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초기 로마시대부터, 중세에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으로부터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며 은둔생활을 했던 지하도시입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40~50년 동안 이 지하도시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데린구유에서 태어나서 바깥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불편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아마 북한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갖가지 모양으로 비난하고 곡해합니다.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갖지 않아도 되는 양심의 가책 등으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믿음으로 진실하게 사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있는지 회의하고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를 알 때 우리는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심판주이시며, 우리는 택함 받은 성도라는 확신을 가진 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6절).

본문 7절은 고난의 목적을 밝혀 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갖도록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믿음의 확실성’(개역성경은 ‘시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확실성이라는 단어는 ‘도키미온(trials, test)’으로, 개역성경의 ‘시련’이란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여기서 ‘시련’이란 말은 금을 생산하는 제련소에서 쓰는 단어라고 합니다. 광석 1톤에 2그램 정도의 금이 섞여 있어도 금광석(gold ore)이라고 합니다. 이 금광석은 3500도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져서 불순물을 걸러냅니다. 그것도 모자라 화공약품을 넣어 여러 단계의 제련 과정을 거쳐 불순물을 다 걸러 내면 비로소 2그램의 순금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고로 얻은 금도 결국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환난으로 단련된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합니다. 환난을 통해 세상에 붙은 모든 거짓 희망을 털어버리게 되어 우리의 믿음은 정금과 같이 순수하게 됩니다. 또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며 그 내면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 이 믿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이 비록 예수님을 보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야말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자’여야 할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9절).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기념하고 깊이 묵상하는 기간을 맞아 우리의 고난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성경적으로 바꾸고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시련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이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롬 5:3~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손에 붙잡힌 하늘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시련이 올 때 시련을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8절)임을 깨달았다면, 이제 더 예수님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고난주간에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셔서 우리 믿음이 자라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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