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백년 미션스쿨, 여전히 찬란한 이름

▲ 개교 당시인 1900년대 신흥학교 학생들과 교사의 모습.

민족 일꾼 바로 키워 새로운 세상 열어간다

투철한 신앙과 애국심 겸비한 ‘하나님 선한 도구’
인재 육성 위한 비전과 사명 한결같이 이어가

화재가 난 것은 사실 엄청난 불운이었다. 학교 본관으로 사용해 온 리차드슨관이 1982년 불에 타 쓰러진 일로 신흥인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재난 중에도 뜻밖의 소득이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고문서들, 마치 타임캡슐처럼 숨어있던 학교 초창기의 기록들이었다.

▲ 1909년에 완공된 신흥학교의 서양식 학교 건물.

전주 신흥학교 최초의 학생이었던 김창국 목사가 집필하고, 박연세 장로가 감수한 이 기록물로 인하여 오랜 세월 숱한 역경 가운데 분실되었던 학교의 소중한 역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흥학교는 1900년 9월 9일 호남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로 개교했다.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16세 소년 김창국을 유일한 학생으로 문을 연 ‘예수학교’는 이듬해 여덟 명의 학생들이 입학하며 주간학교로 발전하고, 1908년에는 신흥학교라는 정식 이름을 얻는다.
“신흥(新興)이라는 말의 뜻은 ‘새롭게 일어나다’는 것이지만, 본디 의미는 새벽 혹은 여명(dawn)에 있습니다. 바로 젊은이들을 바로 키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학교를 만들자는 꿈을 ‘신흥’이라는 이름에 담은 것이지요.”

▲ 건학이념이 선명하게 새겨진 전주신흥고등학교 도서관과 100주년기념관 전경.

신흥고등학교 조재승 교장은 신흥학교의 이름에서 드러나는 정체성이 기독교학교인 동시에 민족학교에 있다고 말한다.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시대, 당시의 기독인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을 새롭게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지(智) 인(仁) 용(勇)’이라는 신흥의 교훈과 나라꽃 무궁화가 들어간 문양 등 학교의 주요한 상징들도 대부분 이 때 만들어졌다.

▲ 1970년대 학교모습

과연 그 기대에 걸맞게 신흥의 청소년들은 투철한 신앙과 애국심을 겸비한 인재들로 자라나주었다. 제5대 교장을 지낸 린튼(한국명 인돈) 선교사가 1931년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신흥 학생들의 신실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 학교에는 매우 활동적인 기독청년회(YMCA)가 있다. 모든 학생들은 이 기독청년회의 회원이며, 그들은 많은 활동을 한다. 그들은 수많은 일요일 오후의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그리고 다른 사업들을 지도한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학생들에게 헌금을 걷어서 요즈음 도회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거지들 중의 몇몇을 불러들여 약간의 쌀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신흥고 스미스 강당과 리차드슨홀 입구 포치.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향한 깊은 동정의 마음은 반대로 불의한 권력에 대한 거침없는 항거로 드러났다. 학교 정문 곁에 세워진 ‘전주삼일운동기념비’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일제 치하 만세운동과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자진 폐교를 감수하는 결기를 과시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도 있다. 간도의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와의 놀랍도록 유사한 공통분모들을 먼저 살펴보자. 신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는 이름부터가 동일한데다, ‘지인용’이라는 교훈까지 꼭 닮았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이 즐겨 불렀다는 ‘용진가’는 신흥학교 교가와 똑같은 멜로디를 사용하는데다, 가사까지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굴욕적인 한일합방 이후 적지 않은 수의 신흥 출신 학생과 교사들이 만주 등지로 이동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흔적들을 꼼꼼히 살피다보면 언젠가 두 학교 사이의 연결고리가 뚜렷하게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한 후 신흥학교 학생들이 고창고보로 떠나는 장면.

신군부가 자행한 5·18 광주사태 당시 학교 교정에서 벌어진 시위도 신흥의 117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5·27 신흥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시위는 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됐고, 자칫 교문 밖에서 대기하던 계엄군과의 유혈충돌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교사들의 목숨을 건 만류 덕분에 이날의 시위는 교정에서의 행진과 시국토론회 및 통성기도회로 마무리됐지만, 이와 관련해 체포되거나 징계조처를 당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 기독교학교로서 신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학생들의 자발적 기도모임.

이들의 정신을 계승한 후배들 중에는 전주 안디옥교회와 바울선교회를 이끈 이동휘 목사, 서울신학대 총장을 지낸 강근환 목사, 민중신학의 거두인 서남동 목사, <사랑의 원자탄> 저자이자 기독신문의 전신인 <파수꾼>의 발행인 안용준 목사, 현 예장합동 부총회장인 전계헌 목사 등 이름난 목회자들이 많다.

현재도 신흥 출신 목회자들로 구성된 신목회(회장:이희룡 목사)가 300여명의 회원들을 거느리고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정세균 현 국회의장, 거창고 교장을 지내며 참 스승상을 제시한 전영창, 현대종교를 설립하여 이단과 맞선 탁명환 소장 등도 신흥이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다.

5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신흥학교는 지금도 다가산과 전주천을 마주보는 전주시 중화산동 소재 캠퍼스에 우뚝 서있다. 졸업생들 대부분이 기억하는 스미스 강당(1935년 건립)과 화재로 소실되고 남은 리차드슨홀(1927년 건립)의 입구 포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머잖아 개교 120년을 바라보는 신흥학교에는 역사관 건립이라든지 학교 복지시설 확충처럼 현안들이 적지 않지만, 학교 구성원들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과제는 달리 있다. 바로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인물들을 바르게 길러내는 일이다.

최근 학교 도서관 외벽에 건학이념인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빛과 소금의 사람이 되라!’는 글씨를 다시 선명하게 새겨 넣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젊은 인재들이 앞으로도 계속 배출될 것이다. 신흥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 조재승 교장

“출세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렸다면 신흥의 교육은 실패한 것입니다. 차라리 학교 문을 닫아야죠. 세상을 살아갈 실력을 기르는 것은 기본이지만 신흥인은 여기에 한 가지 목표를 더 해야 합니다. 바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과 소금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교장 조재승 장로(김제동부교회)는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게 학교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다. 권력과 명예를 좇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든 목회자이든 교사이든 노동자이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 누군가에게 유익을 끼치는 이타적인 인생으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일 아침 담임교사 주관 하에 반 별로 경건회를 가지며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매주 학년별로 진행되는 채플 외에 한 달에 한 번씩은 전 학년 헌신예배가 열리는데, 이 때 학생들이 드리는 헌금으로 북한어린이돕기, 아프리카난민돕기, 연탄봉사 등 뜻있는 이웃돕기 사업을 전개합니다.”

조재승 교장은 요즘 미션스쿨이 제 기능을 못한다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적어도 신흥고에서 만큼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활동들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해마다 봄가을로 열리는 사경회, 추수감사절에 학생들이 가져온 채소와 과일로 복지시설에 선물하기, 60년간 이어져오는 찬송경연대회와 자발적인 기도모임 등 열거하는 항목들에 끝이 없다.

“그렇다고 교사나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 자체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 구성원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는 민주적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흥고 개교 76회(복교 25회 출신)로 학생시절과 평교사시절을 거쳐 3년째인 교장 봉직기간을 더하면 학교와 47년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는 조 교장은 그동안 신흥의 숨은 역사들을 발굴해 자긍심을 높이고 교육역량을 강화하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독교학교로서 안정된 길을 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자신의 남은 사명이라고도 밝힌다.

“120년 역사를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학교가 되도록 기반을 놓으려고 합니다. 학교의 정체성을 꿋꿋이 지키며, 구성원들 간 조화와 화합을 통하여 더욱 건강한 학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매년 여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진행하는 신흥고의 통일기행 모습.

“독서·인문학 교육에 많은 힘 쏟아”

 독서교육은 신흥고의 돋보이는 면모 중 하나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학교 도서관에서 모든 학생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시간 이상을 의무적으로 보내야 한다. 신입생들은 입학식을 마친 후 2박 3일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독서워크숍으로 치르고, 매달 한 번씩 ‘저자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된다.

책과 가까이 하는 시간이 늘다보니 다른 학교에서 볼 수 없는 문화들이 나타난다. 전주시에서 주관하는 ‘독서마라톤’ 대회에는 해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참가해 각종 수상기록을 남기고 있고, 교사독서모임 학부모독서모임 사제독서모임 등 다양한 모임들이 생겨났다. 이런 독서교육 성과들로 인하여 신흥고는 교육부총리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인문사회교육 거점학교로서 평화교육과 통일교육 또한 충실하게 수행한다.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교사와 학생들이 백두대간을 탐방하며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통일기행이 16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가을에는 유명 시인들과 다문화가족들까지 초청해 학생들의 자작시를 소개하고 풍성한 문화적 교류를 도모하는 시낭송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조재승 교장은 “휘발성 지식이 아니라 평생의 밑거름이 될 지식들을 갖출 수 있도록 신흥에서는 독서교육과 인문학교육에 많은 힘을 쏟는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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