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라

▲ 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칼빈 선생을 가리켜 ‘경건의 신학자’라 부른다. 그 이유는 그가 쓴 <기독교강요> 3권 20장 52항을 통해 기도를 설명할 뿐 아니라 가장 많은 항을 한 장에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칼빈 선생을 조직신학자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경건한 신학자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는 도저히 표현하거나 알 수 없는 진리, 경험과 통찰력을 서술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정말 그는 신학과 신앙을 겸비한 ‘경건한 자’가 아닐 수 없다.

기도는 기독교인에게 필연적 요소일 뿐 아니라 매순간 행해야 하는 신앙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매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에도 기도하셨는데 그 장소를 가룟 유다도 알 정도였다. 게다가 그리스도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기도의 정의
기도는 ①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고 ②그분의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인지하면서 일들이 그분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98문). 한 마디로 그분의 뜻에 일치하려는 간구이다. 기도의 시작은 각자가 바라는 소원을 구술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그분 앞에 하나씩 열거하다보면, 부끄럽고 송구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동시에 기다리시고 참으신 그분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렇게 기도는 우리의 열망 또는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분의 만 가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78문). 칼빈 선생 역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그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기도의 필요성
하나님은 전지하신데 우리가 굳이 기도해야 할까? 우리가 구하기 이전에 아시는 하나님께 여쭤야할 이유는 뭘까?(마 6:8 참고)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그분이 안다는 것으로 우리가 기도하지 말아야 할 핑계가 될 수 없다. 기도는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도
판에 박힌 듯이 기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함을 치고 가슴 치는 것이 기도의 자세일까? 양 손을 하늘로 향하여 들고 기도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외형적인 자세보다 심적 자세가 더 요구된다.

이에 대해 칼빈 선생은 올바른 기도의 자세 4가지를 제안한다(3권 20장 4~16항). 이 방법대로 기도한다고 해서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적어도 갖춰야 할 자세를 제안하는 것이라 하겠다. ①하나님을 경외하라 ②회개하라 ③겸손하라 ④확실한 소망을 붙잡으라.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공로나 열정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존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중보자 없이 그분의 존전에 누구도 접근할 수도 없고 합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81문). 그리고 심정을 살피는 하나님께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이 기도다. 기도는 인간 자신의 힘과 의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을 늘 받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도와 기도하도록 한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82문).

기도의 대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일, 교회의 안녕,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84문). 자신과 관련 있는 가족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원수만 아니라 독재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를 서로 격려하는 통로이다. 그렇다고 누구를 위한 중보기도를 통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거나 그런 기도가 효력을 발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자신의 기도의 정성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그릇된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없고 단지 ‘격려의 기도’를 행할 뿐이다. 중보자는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뿐이다(딤전 2:5;). 중보기도라고 언급하지만 실제는 중보가 아니라 ‘격려’라고 봐야 한다. 아무튼 우리의 기도는 타인에겐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떻게 알아서 격려를 받는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로 행해질 것이다.

응답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은 우리의 의지와 감정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올바른 기도에도 근거하지도 않는다. 기도 응답의 확신도 그분이 주셔야 한다. 기도 응답의 확신은 어디에 근거할까?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온정에만 근거하고 개인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다”(3권 20장 10항). 정말 애매한 답변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기도 응답은 인간의 얄팍한 수단으로 점치듯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근거한다.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자는 그 확신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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