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역사신학)

‘과정과 결론은 성경적인가’ 항상 물어야
결정에는 온 교회가 순종하고 결정을 실행하는 적합한 자 선출해야
 

들어가면서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로 나뉜다. 불가시적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교회라 할 때는 가시적 교회를 논할 수밖에 없다. 가시적 교회의 다른 이름으로 지역교회, 지상교회 또는 조직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중생된 자만 아니라 비중생되거나 중생한 척하는 자들도 함께 모인 단체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모임이다보니 하나의 정치가 있게 된다. 정치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다. 사람 간에 성질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융통성 있게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화합을 이룬다는 면에서 좋은 의미다.

칼빈 선생은 <기독교강요> 4권 9장에서 ‘종교회의의 권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오늘의 설교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에서 ‘대회와 총회’와 <벨지카 신앙고백서> 30항 역시 우리의 안내자가 될 수 있다. 크게는 교회의 몸인 총회이지만, 작게는 한 교회 안에 여러 모임을 통해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된다. 어떤 이는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다른 이는 영권을 빌미 삼아 전권을 휘두르기도 한다.
 

성경에 나타난 회의들

아합 왕이 소집한 회의에는 약 400명이 모였다. 모두가 아합 왕에게 아첨하는 자들이었고, 투표로 진리를 정죄하기까지 했다(왕상 22:6, 22). 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려고 모였고(마 26:59), 베드로와 사도를 핍박하기 위해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인 회의도 있었다(행 5:21). 하지만 사도들의 시대에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도 있었다(행 15:6).
 

교회사에서 나타난 회의들

사도들의 시대가 끝난 후 교회는 여러 회의들을 가졌다. 하지만 핍박의 시기 동안엔 지도자들의 회의가 불가능했다. 핍박이 끝난(313년) 후 최초로 325년 개최된 니케아 범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온 교회에 퍼져 있던 이단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381년), 에베소(431년) 그리고 칼케돈(451년)에서 개최된 범종교회의(Councils)가 있었고,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지방회의(Synods)도 있었다. 이후에 개최된 5차~21차 종교회의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결코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통 종교회의

1~7차 종교회의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정교회(Orthodox)와 달리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는 1962~1965년에 개최한 2차 바티칸 종교회의를 모두 범종교회의라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주장하든 프로테스탄트인 우리는 결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정통(orthodoxy)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칼빈 선생의 설명에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올바른 종교회의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①언제, 무슨 문제, 무슨 목적 또는 어떤 이들이 출석했는지 깊게 생각해야 한다. ②성경을 기준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4권 9장 8항). 어떤 경우에 “종교회의들이 서로 불일치 할 때 판단할 수 있는 표준은 오직 성경뿐이다”(4권 9장 9항). 그런데 모두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천명하고 성경을 인용할 때는 어떻게 정통과 비정통을 구별할 수 있을까? 이때는 언행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의 시험대에 소환할 수밖에 없다(4권 9장 12항).

본래 범종교회의는 황제의 칙령으로 소집되었다. 그래서 항상 황제가 동석해서 회의를 주관하고 참관했다. 그가 무슨 결정권을 가지고 있은 것은 아니지만 범종교회의라는 권위를 지니기 위함이었고, 교회의 수호자가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정교분리가 된 상황에서는 이것은 불가능했다. 또 1~4차에 이르는 범종교회의도 정치적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고수하는 측면에서 인간적 부족이 정통성을 꺾지 못한 것이다(4권 9장 10항). 그렇다고 회의 과정이 어떻든 바른 결론이 내려지면 정통성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정도 올바르면 좋겠지만, 그 올바르다는 기준이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면 안 된다. 반드시 성경적이고 합법적이어야 한다. 실례로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비정통성을 지닌 회의였다.

교회는 총회를 소집하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과 이에 적합한 지도자들이 종교의 문제들을 협의하고 논의하기 위해” 대회를 가질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2항). 이에 “결정한 사항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면,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만 아니라, 그것들을 결정하는 회의들에 주신 권세 때문에 법령들과 결정들을 존경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3항).

 
성경적 모임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인 예루살렘 모임은 장로교회의 회의의 참된 실례를 볼 수 있다.

교회 정치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①감독정치 ②회중정치 ③장로정치다. 장로정치가 민주주의적이기에 장로교가 채택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서 사도행전 15장을 들 수 있다.

예루살렘 회의는 오순절 이후 많은 이방인이 개종하면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였다. 바리새파 신자들은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행 15:5). 이에 대해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많은 변론”을 가졌다(행 15:6). 회의 중 베드로가 일어나 “마음(hearts)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강조했다(행 15:8). 그러자 “온 무리[all the multitude]가 가만히 있어” 그의 말과 사도의 권면을 들었다(행 15:12). 야고보는 “시므온[베드로]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agree]”다고 하면서 아모스 9장 11~12절의 말씀을 인용했다(행 15:14~15). 그러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whole church]가…가결하”(행 15:22)였다고 한다.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장로교 정치가 정말 성경적이라는 증거에 큰 위로를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회의에 참여하는 자가 모든 회중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이 사실을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회의 참석은 “사도와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회중, 즉 무리 또는 온 교회의 대표들이었다. 반드시 회의 참석은 대표성을 가진 자라야 한다. 회의 참관은 무리 또는 온 교회가 할 수 있지만 회의에서의 논의는 그들만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또 회의 과정 역시 그들이 서로 앞의 견해를 존중하면서 진행했다. 회의의 결론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성경적임을 표명했다. 결과 이후를 보면 더 놀랍다.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한다. 결정 사안의 순종은 온 교회가 동참하고, 그 결정을 실행하도록 적합한 자를 선출한다. 이것은 성경적 장로교 정치이며 회의다.

 
나가면서

9월이면 총회가 개최된다. 노회에서 상정된 바른 안건들이 올라와 충분히 논의하고 토론하여 성경적 결론을 내리기를 바라는 심정을 갖는다. 이에 따라 온 교회는 총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는 회의의 지침이다. 어떤 이는 총회를 ‘성(聖)총회’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나타나는 회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 교회는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할 뿐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일원들 역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참여하는 대표들은 경건한 심정으로 참여하고 논의해야하고, 이끄는 지도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회의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과정 역시 서로를 존중하는 심정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성경적인지 참여한 대표들은 살피고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성경적인데도 분위기나 인간관계로 내린다면 총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선포하더라도 그 효력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결론이 성경적인데도 순종하지 않는 것 역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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