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참된 교회는 순전한 말씀 선포 힘쓴다
거짓된 교회가 포장하고 범람해도 그곳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도 참된 교회는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 아니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 참된 교회는 분명히 있다. 그 증거로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왕상 19:18)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아무리 암흑의 중세시대나 핍박의 시기에서도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들을 유지했고 우리들에게 전해줬다.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선배들의 어려운 시기에 비해선 그래도 나은 편이라 사료된다.

하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나 목회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분별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있다며 안심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핍박받는 시기에 순교자 귀도 드 브레에 의해 작성된 ‘벨지카 신앙고백서’(1536년)의 27~29항에서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에 대한 고백을 표명한다. 칼빈 선생은 교회에 대해 설명하는 <기독교강요> 4권 1~2장에서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에 관해 설명한다. 총 4권 중 제4권이 가장 길고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외적 은혜를 받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할 일, 교회의 권한 등을 자세히 교회 역사적으로 밝히는 설명을 통해 우리는 큰 통찰력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열왕기를 읽다보면 이스라엘이 부족하고 부패한 교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교회가 거짓된 교회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부패한 교회가 거짓된 교회와 동일하다는 공식은 금물이다. 거짓된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 부패했다고 해서 구원이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부족하여 부패한 모습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거짓된 교회라고 단정지울 수 없다.

구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에 대해 반드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의 선배들은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를 밝혔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참된 교회의 표지가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교회는 영적 모친으로 신자들을 진리로 양육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표지

참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칼빈 선생은 이렇게 내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선포되고 들리는 곳마다 또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른 성례의 집행을 보는 곳마다” 참된 교회는 있다(<기독교강요> 4권 1장 9항). 이에 따라 ‘벨지카 신앙고백서’의 29항은 “참된 교회는 다음의 표지를 가진다고 봐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순전하게 선포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을 순전하게 집행해야 하고, 그리고 오류들을 바르게 하는 기강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칼빈 선생과 ‘벨지카 신앙고백서’의 차이는 없지만, 있다면 ‘벨지카 신앙고백서’에선 ‘기강’을 첨가했다는 것이다. 루터파에서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바 있다. 아무튼 참된 교회의 표지 두 가지는 공통점이다. 하나는 순전한 말씀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제정에 따른 성례 집행이다. 여기서는 두 번째 요소에 관해서 여기서 다루지 않고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다.

 
순전한 말씀 선포와 청취

단순한 말씀 선포가 아니라 ‘순전한 말씀 선포’이다. 여기서의 말씀은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 앵무새처럼 말하고, 예화를 적대시 하면서 성경 구절을 줄줄 외우고, 자신의 생각을 성경 구절에서 증명시키고, 대중의 구미에 맞춰 설교의 기교를 부리고, 박식한 철학을 언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씀은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삶 속에 또 실제로 살면서 바라보며 체득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들린 하나님의 말씀, 즉 기록된 말씀을 삶 속에서 체득될 때야 비로소 말씀(verbum)이 되는 것이다. 말씀과 선포자가 달리 나타난다면 그것은 순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설교자 삶 속에서 반영되어 나타나야 한다.

선포만 아니라 대중의 순전한 청취 또는 순종이 따라야 한다. 성경공부에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을 낸다고 하여 순전하게 듣는 것이 아니다. 읽고, 듣고 지키는 것에 있다(계 1:3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호기심으로 연구하는 자들이 많다. 부패한 인간성은 치우치기 마련이다. 조금 알면 자랑하고 그런 자를 추종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는 제자가 되려고 또는 실천하려고 사모해야 한다(1권 6장 2항 참고).
 

거짓된 교회의 모습

부족하고 타락한 교회에 관해선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나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또 예레미야(23장)와 에스겔(13장)에서 거짓 목회자에 관해 성토하는 것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 민수기 16장과 열왕기상 12장에 등장하는 거짓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민수기 16장은 레위파 고라, 다단 및 아비람이 당을 지어 모세에 항거하는 모습을 상술하고 있다.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 여기서 말하는 총회는 교회를 지칭하는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항거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항상 교회에는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누군지 모르지만 있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넘어질 수 있다. 이 일에 늘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든 쉽게 넘어지고 말 것이다.

이때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에게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된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민 16:5)라고 한다. 결국 모세를 항거하는 무리들은 거짓임이 드러났고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민 16:31)졌고, 분향하던 250명이 불에 타 죽었다(민 16:35). 참된 교회에 항거하는 거짓된 교회의 최후의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따금 거짓된 자들이 교회를 위협하려고 할 때, 거짓된 교회가 참된 교회인체하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의 전말을 밝히신다. 어떤 방법으로 나타나는지는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 이것은 은밀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명하고 경건한 자는 깨닫고 경성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실례를 다음을 통해 보도록 하자.
 

고안물

열왕기상 12장을 통해 거짓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2지파 중 10지파의 지도자로 추앙된 여로보암 왕이지만 정통성의 부재로 인해 늘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정치적으로 나눠졌지만 북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에는 예루살렘이 여전히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요 4:20 참고). 이에 불안을 느낀 여로보암(왕상 12:27)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리게 된다.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선언했다(왕상 12:28). 한 제단을 벧엘과 다른 제단을 단에 설치했다(왕상 12:29). 이스라엘 백성의 동요를 금하기 위해 거짓을 가장한 고안물로 신앙을 유지하도록 이끌었다. 게다가 “또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니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했다(왕사 12:31~32).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다른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준수하라고 강권했다(레 23:33~34). 드린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겠지만 간교하게 다른 날로 지킨 것이다.

뿐만 아니다. 반드시 레위파로 제사를 주도하도록 해야 하지만 여로보암은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이것은 명백하게 그릇된 행위였다. 하나님을 섬지기 않았을 뿐 아니라 그분이 내린 지침대로도 아니고 나름대로 섬기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작금에 일어나는 성직 매매를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안수집사, 권사 및 장로를 헌금이라는 미명 하에 기부금을 내도록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나 교회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잔재이다. 목회자 임명에도 보면, 신학교만 나오면 누구든 목사가 된다. 순전한 말씀 선포이기 보다 자신의 심리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을 설교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지상에 아무리 거짓된 교회들이 포장하여 범람하더라도 노아가 있듯이 참된 교회는 여전히 그분이 오실 때까지 존재할 것이다. 참된 교회는 순전한 말씀 선포에 여념 없이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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