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수 장로((주)이세산업 대표이사)

 
하나님 영광 위해 ‘믿음의 건축’ 진력한다
총신신대원 리모델링 비롯 헌신 자세로 50여 교회 건축…
“고비마다 비전과 기도가 날 일으켰다”


주식회사 이세산업 대표 이완수 장로는 굳건하고 강직했다. 이 장로의 70년 삶에서 평안하게 흘러가는 시절은 없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비전을 세웠으며,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했고, 32세에 거대 기업을 운영할 정도로 성공했다. 물론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실패와 좌절도 있었다. 실패했을 때 낙심하지 않았던 그 힘은 기도였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 했던 신앙이었다.
 
신앙을 일깨운 세 명의 목회자

이완수 장로가 굳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세 명의 목회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부강장로교회에서 가르침을 주었던 고 양태규 목사, 청년기 삶의 방향을 인도해준 고 한경직 목사, 그리고 장년이 되어 40년 동안 섬기고 있는 성문교회 황정식 목사. 이 장로의 삶을 관통하는 신앙은 이 세 명의 목회자를 만나면서 다져졌다.

“양태규 목사님은 이북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혼자 사셨다. 교회 아이들을 정말 아들딸처럼 사랑하셨다. 양 목사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다. 양 목사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다.”

양태규 목사에게 배운 신앙은 평생 그의 삶에 각인됐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의 기틀을 잡아 준 것이다. 비전을 품고 대학진학을 위해 치열하게 공부할 때도 책상에 앉아서 먼저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한 후 책을 봤고, 건설회사를 운영하면서 1년에 꼭 한 교회는 수익을 생각하지 않고 선교의 마음으로 예배당을 건축했다.

가난한 학생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은 시간 밖에 없다며 1시간씩 기도하는 신앙, 하나님이 주신 건축의 달란트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앙. 이완수 장로는 이런 굳건한 신앙의 기초를 세 목회자에게 배웠다고 고백했다.
 
▲ 이완수 장로가 헌신으로 건축한 총신신대원 양지캠퍼스 리모델링을 마치고 학교 관계자들과 준공식을 진행하고 있다.

믿음과 용기로 비전을 세우다

흔들림 없는 신앙과 함께 이완수 장로의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모습은 ‘비전’이다. 대전공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 장로는 기업체에 특별채용됐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랐지만 넓은 세상에서 일하고 싶다는 비전은 그를 다른 삶으로 이끌었다. 기도하면서 그 꿈을 키웠고 용기를 얻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다.

“주경야독이었다. 2년 동안 누워서 잠을 자지 않았다. 겨울 새벽에 우물가로 나가서 온 몸에 물을 끼얹으며 공부했다. 하지만 주일에는 온전히 교회에서 지냈다. 하나님께서 꿈과 용기를 주시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믿음과 의지는 높아갔다. 서울대의 다른 단과대학은 모두 기독학생회가 조직돼 있었는데, 공대만 기독학생회가 없었다. 기독 학생들을 독려해서 기독교학생회를 조직하고, 한경직 목사를 지도목사로 모셨다. 그리고 기독학생회장을 맡아 영락교회 등 서울 지역 교회들의 후원을 받아서 기독학생회관까지 건축하는 역사를 이뤄냈다.

“당시 한창 캠퍼스복음화 불길이 타올랐다. 기독학생회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위해 한경직 목사님 김형석 교수님 등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강좌를 열었다. 공대 기숙사의 550명 학생들이 강좌를 듣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기독학생회관 건립은 이런 캠퍼스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교회를 위해, 민족을 위해

해병대 장교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후, 이완수 장로는 32살 젊은 나이에 선배와 함께 경서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회사는 건실하게 성장했다. 선배는 서교호텔을 건축해서 호텔사업에 뛰어들었고, 크리스탈백화점까지 설립해 유통업까지 확장했다. 그러나 급격한 사업 확장으로 서교호텔과 크리스탈백화점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고, 이 장로가 운영하던 경서건설주식회사도 결국 동반 추락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 치밀하게 경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후 다시 서기 위해서 6년 동안 고생했다. 신앙이 없었다면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재기하여 이세산업을 설립하고, 교회를 위해 사업을 할 수 있었다.”
 
▲ 서울대 공대 기독학생회장 시절 이완수 장로(맨 왼쪽)가 한경직 목사(가운데) 등과 함께 학생회관 기공식을 하고 있다.
종합건설회사 이세산업은 지금까지 50여 교회 예배당을 건축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마음으로 헌신했다. 2013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양지캠퍼스 리모델링 공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총신대는 양지캠퍼스 학업환경 개선을 위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신대는 100억원 규모의 공사를 감당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 건설업체가 최하 공사비로 77억원을 제시했고, 리모델링 사업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세산업이 총신신대원 리모델링 공사를 65억원에 맡았다.

“평생 교회와 사업만 하며 바쁘게 살았다. 총회를 위해서 한 일이 없었다. 마침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일하고 총신대 재단이사로 섬길 기회까지 주셨을 때, 리모델링 공사가 난관에 부닥쳤다. 하나님께서 내게 헌신할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7억원 정도 손해가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완수 장로는 2007년부터 국제옥수수재단 김순권 박사를 만나 민족을 섬기는 사역도 하고 있다. 김순권 박사와 함께 북한을 10여 차례 방문하면서 옥수수 종자 냉동창고와 농촌시험소 건축 등을 맡아 일했다. 지금도 북한에서 초청장이 오지만, 5.24조치로 2년 넘게 방북을 못하고 있다. 이 장로는 북한을 다니며 동족의 현실을 목격했기에, 하루빨리 남북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내내 이완수 장로는 자신의 삶과 신앙이 소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드러낼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앞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완수 장로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렸다.

“이 땅에 내 것은 없다. 내게 맡겨주신 여건 속에서 충성된 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뿐이다. 이 땅의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우리 신앙인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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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수 장로는 1944년 현 세종특별자치시로 변경된 충남 연기군에서 출생했다. 대전공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기업체에 특별 채용됐지만, 비전을 갖고 공부에 매진해서 1964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서울대 공대 시절, 한경직 목사를 만나 기독학생회를 설립했고 회장을 역임했다. 기독학생회 회장으로 섬길 당시 서울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며 기금을 모아 기독학생회관을 건립한 일화는 유명하다. 1968~1972년 해병대 장교로 임관해서 월남전에 청룡부대 소대장으로 참전한 후, 1975년 경서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나섰다. 대학 선배와 함께 설립한 경서건설주식회사는 이후 (주)서교호텔과 (주)크리스탈백화점까지 건립하며 사업 규모를 키웠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서교호텔과 크리스탈백화점에 위기가 닥쳐 경서건설주식회사까지 도산하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 이 장로는 1989년 종합건설사 (주)이세산업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건실하게 경영하고 있다. 현재 이완수 장로는 대한건설협회 대의원, (사)국제옥수수재단 이사, 건설협회 서울시회 정책위원장, 총신대학교 재단이사 등을 맡고 있다.

“진실한 목회자의 헌신은 삶의 기쁨이고 은혜였다”


이완수 장로는 인터뷰를 하며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친 양태규 한경직 황정식 목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세 명의 목회자를 이야기할 때, 공통적으로 빼놓지 않은 말이 있었다. “사심 없이 오직 목회만 전념하셨다. 전하는 말씀대로 실천하려는 목사님이셨다.” 이런 진실한 목회자에게 신앙을 배운 것이 기쁨이고 은혜라고 했다.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내려운 성도들을 중심으로 세운 교회이다. 한경직 목사님은 사례비를 받으면 어려운 성도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양태규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모두 전적 희생과 청지기적 생활을 보여주셨다. 성문교회 황정식 목사님도 오직 목회일념으로 교회를 위해 사신 목회자이시다. 정말 감사하다.”

이완수 장로는 최근 한국 교회의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프다고 했다. 교회가 추락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일부 목회자의 일탈이 언론을 통해 보도될 때마다, 양태규 한경직 목사 같은 지도자가 더 간절하다고 말했다.

“사회가 변화하고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목회자와 성도 모두 순수한 신앙이 변질된 것 같다. 누구보다 목사님들이 맡겨주신 목양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 주시길 바란다. 양은 결국 목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한다. 나 역시 목사님들의 삶을 보면서,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을 키웠다. 목회자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헌신을 보여준다면, 성도들 역시 그 헌신을 따라 배울 것이다.”

이완수 장로는 올해 31년 동안 섬긴 장로 직분에서 물러난다. 은퇴를 앞둔 장로의 고언이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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